'부산 정신과 의사 피살’ 병원서 숙식 해결하던 환자의 계획 범죄

입력
2020.08.16 09:00
치료비 면제 '의료수급권자' 숙식 위해 정신과에 입원
건보재정 낭비뿐 아니라 치료 필요한 환자 입원 못해

편집자주

여운잇슈는 사건사고를 따라가는 한국일보 사회부 경찰팀 기자들이 운용하는 새로운 코너입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거나 지나간 사건 및 이슈를 소환해 심층 분석하면서, 사회적 의미를 차분히 되짚어 보자는 취지입니다. 와인을 삼킬 때 진한 포도향이 코끝을 맴돌 듯 뉴스에 남아 있는 여운을 한 번 더 음미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달 5일 부산 정신과 의원에서 입원 환자가 의사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료진들은 2018년 12월 유사한 사건으로 숨진 고(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사례를 악몽처럼 떠올렸습니다. 임 교수에 이어 또 다시 동료 의사를 잃게 된 사실에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언론 역시 2년도 안 돼 환자의 공격에 의사가 목숨을 잃은 이 사건을 ‘부산판 임세원 사건'이라고 부르며 주목했습니다. 여전히 의료진이 폭력 상황에 무방비로 노출된 것이 드러난 만큼 지난해 10월 시행된 ‘임세원법’(의료법 일부개정법률안)의 사각지대를 보완할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 사건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면 임 교수 사건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정신건강의학과 분야에서 자신이 돌보던 환자의 손에 의료진이 사망했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환자 상태나 사건 정황 등을 보면 임 교수의 사건과 상당히 다른 구석들이 발견됩니다.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접한 관계부처 공무원이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들도 “부산 피살 사건을 임 교수 사건과 동일시하다가는 자칫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부추길 뿐”이라고 입을 모아 말합니다.

어째서 ‘부산 정신과 의사 피살 사건’은 ‘부산판 임세원 사건’이 아닌 걸까요?



'부산 사건’은 우발 아닌 계획적 범죄

‘부산 정신과 의사 피살 사건’은 5일 부산 북구 화명동에 있는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에서 60대 남성 A씨가 진료를 보던 의사 김모(60) 원장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사건입니다. A씨는 이날 오전 9시 25분쯤 품속에 30cm의 식칼을 숨긴 채 김씨가 있는 진료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당시 문 앞에 있던 간호사는 A씨가 “원장님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 들어가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A씨가 들어간 직후 진료실에서 김 원장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다급히 진료실 문을 연 간호사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김 원장과 흉기를 든 A씨였습니다. 간호사는 서둘러 112와 119에 신고를 했습니다. 간호사가 신고를 하고 경찰과 구급대의 출동을 기다리는 동안 김 원장의 가슴과 복부에 십여 차례 흉기를 휘두른 A씨는 범행 직후 진료실을 빠져나와 병실에 휘발유를 뿌리고 창문을 깨는 등 소란을 피우다가 출동한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출동한 구급대는 김 원장을 양산부산대병원으로 급히 옮겼으나, 김 원장은 끝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정신과 병원이라는 점 △가해자와 피해자가 환자와 의사 관계였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임 교수 피살 사건과 같이 정신질환 환자에 의한 우발적 살인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일각에서는 "정신질환자들은 잠재적 범죄의 소지가 있다"거나 "정신질환자들이 강력 범죄를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심신미약으로 감형을 받는다"는 등 정신질환자의 우발적 범죄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일보가 이 사건의 배경을 취재한 결과에 따르면 ‘부산 정신과 의사 피살 사건’에서는 우발적 범죄가 아닌 계획 범죄의 정황이 다수 드러나 있습니다. 범행을 저지르기 하루 전인 4일, 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A씨는 병원을 빠져나와 7시간 동안 범행 도구를 물색하고 구입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4일 오전 9시 등산가방을 멘 상태로 병원을 빠져나가 오전 10시쯤 시내 한 상점에서 흉기를 샀습니다. 흉기를 구입한 A씨는 휘발유를 구입하기 위해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A씨는 마침내 노점에서 휘발유가 담긴 900ml 가량의 페트병 5개를 사서 가방에 넣고 태연하게 병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의료진 역시 가방만 볼 수 있었을 뿐 그 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루 동안 흉기가 병원 안에 비치된 상태로 있다가 다음날 범행도구로 사용됐습니다. 하루 전 미리 흉기를 물색 및 구입한 뒤 이를 숨겨서 병원에 들어온 점 등을 비춰 볼 때, A씨의 범행행태는 이전의 정신질환자들의 강력범죄의 공통점인 우발적 범죄와는 전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 입원에서 비롯된 '부산 사건’

그렇다면 ‘부산 정신과 의사 피살 사건’은 왜 발생한 것일까요? A씨의 범행이 계획적 범죄로 볼 수 있는 정황이 다분한 만큼, 범행 이전 A씨의 행적과 범행의 동기를 토대로 그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A씨는 6월부터 김 원장이 있는 병원에 조울증으로 입원해 치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A씨의 입원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김 원장의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 A씨는 부산에 있는 한 병원 입원실에서 수개월간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1급 기초생활수급자였던 A씨가 1종 의료급여 수급권자로서 본인부담금이 전혀 없이 병원에 입원을 하며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A씨는 밥을 주는 병원을 찾다가 김 원장의 병원을 발견했고, 올해 6월부터 김 원장의 병원에 입원하며 치료를 구실로 숙식을 해결해왔습니다. A씨의 주민등록주소지가 김 원장의 병원 주소로 되어 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습니다.

이처럼 A씨의 입원은 실상 치료가 아닌 거주가 목적인 ‘사회적 입원’이었습니다. ‘사회적 입원’이란 질병치료가 아닌 생활·요양 등을 목적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김 원장 역시 A씨가 조울증에 따른 경증 정신질환 환자라서 굳이 입원이 필요하지 않고 외래진료로 충분히 치료 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입원을 하겠다고 소동을 피우는 A씨를 제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정신질환자 자신의 의지가 있으면 입원을 권장하는 정신건강복지법에 따라 의료진 의사보다 정신질환자의 입원 의사가 우선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김 원장은 A씨의 입원을 허용했고 A씨는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2개월 가량 병원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A씨의 입원 목적이 치료가 아닌 거주였던 만큼, 제대로 된 치료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A씨는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도 않았고, 병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등 병원 규칙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김 원장이 A씨에게 “지정된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라”고 말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결국 김 원장은 A씨에게 퇴원지시를 내리고 지난달 31일 퇴원수속을 시켰습니다.

거주가 목적이었던 A씨에게 김 원장의 퇴원지시는 집을 나가라는 것과 같았습니다. A씨는 “머물 곳을 알아볼테니 주말만 있게 해달라”며 일단 버텼습니다. 하지만 주말 이후 김 원장은 A씨에게 “주말이 끝났으니 이제 나가라”고 재차 퇴원을 종용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A씨가 5일 범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임세원법’ 보완보다는 정신건강 인프라 마련이 우선

정신건강 분야에 종사하는 의료진들은 '부산 정신과 의사 피살 사건’이 발생한 뒤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과연 나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까’라는 불안함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사건 발생 이후 의료진들이 호신 기구를 살 수 있는지, 가스총을 쓸 수 있는 지 등의 문의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의료진들은 '변하지 않는 정신건강 시스템'이 가장 불안 요소라고 말합니다. 보안요원을 배치하고 비상벨을 설치하는 ‘임세원법’만으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할 수 없다는 얘기지요. 환자가 숙식 해결을 위해 입원하는 ‘사회적 입원’이 계속되는 현재의 정신건강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병원이 환자가 아닌 이들까지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립정신건강센터가 발간한 ‘국가 정신건강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한 해 동안 정신의료기관에 입원한 환자는 14만 3,156명으로 이 중 7만 1,061명이 의료급여 수급권자였습니다. 이는 정신질환자 중 상당수가 생활유지 능력이 없거나 생활이 어려운 저소득층임을 의미합니다.

정신질환 분야에서 의료급여로 지출되는 입원진료비는 다른 질환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입니다. 12일 중앙정신건강복지사업지원단이 발간한 '의료급여 수급권자 중 정신질환 진료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한 해 동안 전체 질환의 입원비용은 3조 6,419억인데, 이 중 ‘정신 및 행동장애’의 입원비용이 1조 1,884억(33%)으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1인당 입원일수 역시 ‘정신 및 행동장애’의 입원일수가 212일로 전체질환의 입원일수 중간값인 18일에 비해 무려 11.8배 높은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이 통계로 본다면 정신질환 분야에 의료급여 수급권자들의 숫자가 많고, 이들이 장기간 입원하게 되면서 총 입원진료비 역시 높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권준수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의료급여 수급권자 중 ‘사회적 입원’에 해당하는 이들이 상당한 만큼, 결국 국가예산의 지출이 남발된다”면서 “사회적 입원을 통한 병실 과밀에 따른 만성화는 정작 치료가 필요한 이들이 치료를 받을 수 없게 되고, 의료진들의 업무 부담 역시 가중될 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부산 정신과 의사 피살 사건’을 계기로 주목해야 할 관행은 사회적 입원 현상입니다. 정신건강 진료 분야에 대한 사회경제적 비용을 줄이고 정말 치료가 필요한 이들에게 적정치료를 받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권 교수는 “커뮤니티 케어 등 인프라를 마련해 탈병원화를 하는 식으로 사회적 입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부가 의료급여 제도를 남용하는 사람을 더 효율적으로 발견하고 이를 통제하는 방안도 필요합니다. 불필요한 의료비를 관리하는 것은 물론, 단순히 자립의지가 없는 의료급여 수급권자에 대해서는 무작정 지원을 하기보다 자립의지를 높이는 방향이 모색되어야 합니다.

김영훈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