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세계 최초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승인하며 출시를 목전에 뒀지만, 의학계와 국제사회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백신 상용화의 필수 전제인 임상시험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고, 시험 결과도 공개하지 않은 ‘깜깜이’ 개발 과정 탓이다. 효능과 안전성 모두를 담보하지 못하는 백신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1일(현지시간) 러시아 보건부 산하 ‘가말레야 국립 감염병ㆍ미생물학 센터’와 국방부 제48중앙과학연구소가 공동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이 보건부의 승인을 얻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지난달 28일 “8월 10일까지 백신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러시아 정부의 공언이 현실이 된 셈이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반기기는커녕 허술하기 짝이 없는 러시아의 백신 개발 과정에 일제히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러시아는 백신 출시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임상 3상시험을 건너 뛴 것은 물론, 통합돼 실시된 1상과 2상 시험도 고작 38명을 상대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결과도 공표하지 않았다. 통상 임상 1상에서는 독성과 부작용 등 안전성을 검증하며 2상에서는 투약 용량과 실제 효율성을 평가해 3상 진행 여부를 결정한다. 이 모든 절차가 누락된 것이다. 대신 러시아는 자국 내 2,000명을 비롯해 아랍에미리트(UAE)와 사우디아라비아, 브라질, 멕시코 등에서 3상 시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효과도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덜컥 백신 승인부터 하고 사후 검증을 하겠다는 얘기다.
무책임한 러시아 측 발표에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알레르기ㆍ감염병연구소(NIAID) 소장은 “백신 제조는 해당 약물의 안정성과 효과를 증명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대니얼 살몬 미 존스홉킨스대 백신안전연구소장도 “러시아가 백신에 위약(placebo) 효과를 넘어서는 무엇이 있는지와 접종자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지를 검증하는 3상 시험을 건너뛰는 위험한 걸음을 내디뎠다”고 꼬집었다. “멍청함을 넘어선 행위(존 무어 코넬대 웨일의학전문대학원 교수)”란 원색적 비난도 나왔다.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겉으론 신중한 입장을 밝혔지만, 러시아의 성급한 결정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WHO는 “러시아 당국과 긴밀히 접촉하고 있으며 백신의 WHO 사전자격인정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다”면서도 “절차를 가속하는 것이 안전성과 타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현재 러시아산 코로나19 백신을 쓰겠다고 한 나라는 필리핀이 유일하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10일 TV 연설에서 코로나19 백신을 무상 공급하겠다는 푸틴의 제안을 공개한 뒤 “백신이 도착하면 내가 첫 시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사실상 수용 의사를 내비쳤다. 필리핀의 코로나19 누적 확진 환자 수는 12일 기준 14만명에 달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