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실패한 정의론

입력
2020.08.04 01:0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두 번 줬던 표(票)를 회의하게 되면서, 대통령 취임사를 다시 찾아보게 됐다.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그때까지 들었던 어떤 정치인의 말보다 달콤했다. 정의로 향하는 길을 이보다 명쾌하게 제시한 표현은 일찍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성장이나 개발을 약속하는 대신, 세상을 움직이는 본질적 원칙에 천착하려는 모습은 신선했다.

학부 정치사상 수업 때 롤스의 ‘정의론’을 배우며 느낀 아쉬움. 우리는 언제쯤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 구성원 누구나 동의하는 원칙에 관한 담론을 시작할까? 대통령의 말은 그 목마름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빈부ㆍ지역ㆍ사상 등 사회를 종횡으로 갈랐던 갈등요소를 통합해 권리ㆍ의무의 시작과 한계를 설정할 근본기준(보편적 정의)을 찾는 논의가, 이 땅에서 드디어 시작될 듯 했다. 그때까지는.

현실은 반대였다. 3년간 여권의 정의는 그들이 적폐라 규정한 대상을 향해서만 서릿발 같았다. 반성하는 시늉이나 떠밀린 읍참마속마저 사라졌고, 인사청문회에선 더 이상 낙마자가 나오지 않는다. 정책 실패를 아직도 이명박, 박근혜 탓으로 돌리는 모습엔 말을 잃게 된다. 나만 정의롭다는 선택적 정의가 통치원리를 지배하자, 세상은 더 날카롭고 잘게 갈라졌고 통합의 길은 멀어졌다.

대통령의 정의론은 실패했고 우리는 정의담론을 시작할 기반을 여전히 마련하지 못했다. 실패의 이유? 대통령 표현을 빌리자면 △정의 어젠다 형성 과정에서 기회가 평등하게 제공되지 못했고 △권력의 정의 추구 과정이 공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상대 입을 틀어막으면서, 자기 지척에서 일어나는 막말ㆍ성범죄ㆍ권한남용엔 눈을 질끈 감은 결과다.

이 정부의 선택적 정의는 대통령이 박수받을 말만 하는 ‘선택적 언급’에서 두드러진다. 대통령 말엔 정권의 성과와 장밋빛 미래만 있을 뿐 자성은 찾기 어렵다. 조국ㆍ윤미향ㆍ박원순 등 지지자까지 고개를 내저은 대형 스캔들에서조차.

법무부(Ministry of Justice)마저 선택적 정의를 향해 뛴다는 점은 이 정부의 정의관념을 여실히 보여준 단면이다. 법무부장관 말과 행동의 기준은 정의로움이 아니라 ‘윤석열’이 된 지 오래다. 압수수색 도중 부장검사가 피의자를 덮친 희대의 활극은 지금 누가 검찰권을 남용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지만, 피의자 인권을 그토록 강조하던 법무부는 침묵했다. 조국 자택이나 울산시청 압수수색에서 그런 육탄전이 있었다면, 귀책사유가 어디 있든 담당검사는 당장 장관의 불호령을 맞고 감찰을 당했을 것이다. 윤석열 사단만 검찰권을 남용할 거라 확신하는 틈에, 서울중앙지검은 위원회 권고를 무시하거나 현장에서 물의를 빚어도 아무 제지를 받지 않는다.

정의는 내 편 네 편을 구분하는 순간 불의로 타락한다. 정의의 여신상들이 대부분 눈가리개를 하고 있는 것처럼, 정의담론은 편을 고려하지 않는 지점에서 시작해야 함에도, 그러지 못했다.

우리는 3년간 집권세력이 휘두르는 선택적 정의라는 칼이 매우 강력한 무기임을 실감했다. 그래서 다음에 정권을 잡는 쪽도 보편적 정의를 추구하기보단 정권에 도움되는 선에서 정의를 선별적으로 좇을 것이다. 그렇기에 대통령의 실패한 정의론은 한 진영만의 타락이 아니라, 이 나라 전체 정의의 파산과 다르지 않다.

이영창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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