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중심 한국어학당...그 뒤편 갑을 관계의 먹이사슬

입력
2020.07.3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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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학당서 벌어지는 일 그린 '코리안 티처'


TV를 틀면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들이 쏟아진다. 그들은 한국의 역사에 대해 한국인보다 더 방대한 지식을 뽐내고, 매운 한국 음식을 거침없이 먹으며 ‘맛있어’를 연발한다. K팝의 한국어 노래 가사를 자국어로 번역하고 민간 외교관으로 활약한다.

실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능력시험(TOPIK)의 응시자 수는 지난해 37만 5,871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1997년 2,692명이었던 지원자 수에서 100배 넘게 증가한 숫자다. 더 부연할 필요도 없이, 한국어 교육은 한류를 지탱하는 힘이자 가교다.

정작 이 외국인들이 한국에 들어와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선생님은 비정규직 노동자일 확률이 높다. 어학당을 운영중인 대학에 소속된 한국어 선생님들은 대부분 정식 교원이 아닌 용역이나 자체 직원이다. 근로계약서, 4대보험, 휴가, 병가 수당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 국민이 아닌 외국인을 가르치기 때문에 교육부 소속이 아니며 강사법의 적용을 받지도 않는다. 압도적인 비율로 여성이 많이 종사하지만, 경력을 바탕으로 교수나 관리자가 되는 것은 대개 남성이다.

서수진 작가의 ‘코리안 티처’는 바로 이 그늘을 그린다. 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근무하는 네 명의 여성 시간강사 이야기를 통해 고학력 비정규직 여성의 현실과 외국인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는 한국어 교육 현장을 생생하게 담아낸다. 올해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작가 역시 이화여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해 한국의 여러 대학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다. 현재는 호주 시드니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소설은 봄 학기에서 겨울 단기까지 총 다섯 개의 학기로 구성돼 있다. 각 학기마다 한국어학당에 근무하는 네 명의 강사 선이, 미주, 가은, 한희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이끈다. 네 명은 강사가 된 계기도, 성격도, 처한 상황도 모두 다르지만 ‘고학력’ ‘비정규직’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봄 학기의 주인공인 선이는 어학당이 비자가 필요한 베트남 학생을 대거 유치하기 위해 베트남특별반을 신설하면서 채용된 강사다. 이 반의 학생들은 TV에 나오는 것처럼 한국에 대한 호기심과 호의로 눈이 반짝거리는 외국인이 아니다. 동대문 지하 공장에서 오후 5시부터 새벽 4시까지 일하느라 수업 시간에는 엎드려 부족한 잠을 채워야 하는 학생이자 노동자다.

임금 체불을 당한 자신의 학생을 위해 대신 사장에게 항의하던 선이는 이들이“‘부당하다’보다 ‘정당하다’가, ‘모욕적이다’보다 ‘감격스럽다'가 더 한국 생활에 유용한 단어라고 느끼기를” 바란다. 그러나 선이의 연민은 베트남 남학생 한 명이 몰래 찍은 선이의 사진을 '#KoreanHotGirl' '#AsianGirl'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복잡해진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면서 동시에 언제든 성적대상화 될 수 있는 선이와, 남성이면서 이주노동자인 학생의 지위가 충돌하면서 선이는 혼란에 빠진다.



성별과 국가의 위계는 두 번째 미주의 에피소드에서 더욱 첨예하게 얽힌다. 미주는 수업에 불성실하며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한 니카의 태도가 당연히 ‘백인’ ‘남성’이라는 그의 정체성에서 기인한다고 짐작한다. 그러나 이 같은 미주의 짐작이 틀렸음이 드러나는 순간, 독자는 피해자의 가해자의 위치가 그렇게 단순하게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 강의평가에서는 늘 1등을 하고 어학당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선생님이지만 결국 이 인기에 발목 잡히고 마는 가은과, 시간강사들의 계약 연장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책임강사지만 마찬가지로 본부의 계약 연장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한희의 에피소드가 더해지면서 소설은 긴장을 더해간다.

약자와 강자의 위치가 끊임없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한국어학당은 갑과 을의 굴레가 먹이사슬처럼 이어지는 한국 사회 축소판이기도 하다. “교육도 서비스입니다. 학생들이 돈을 내고 여러분은 그 돈으로 일자리가 보장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원장의 말과 “우리는 한국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국에 왔어요. 하지만 한국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아요. 한국 사람들은 우리가 돈을 쓰는 사람입니다”라는 외국인 학생의 말이 소설에서 함께 메아리 친다. 그 메아리가 아마도 ‘한류’의 묻혀진 목소리일 것이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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