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 "판자촌서 유년기"... 난민운동 나선 90년대 청춘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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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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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청춘 스타 정우성

편집자주

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가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세상이 무섭거나, 일이 무섭다는 생각이나 단어를 개입시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냥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가족이 돌봐주거나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지 않고, 그렇다고 학교에서 잘 배운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나 혼자 세상에 튀어나와 살아왔다. 최선을 다하다가 지갑을 잃어버리면 그때의 운이지 그렇다고 내가 죽을 일은 아니니 어떤 일이 닥쳐도 하나씩 받아들이고 가면 된다고 생각해왔다.” (정우성, 월간지 아레나 옴므플러스 2014년 12월호 인터뷰)

정우성(47)은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 산동네 판자촌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비트’(1997)와 ‘태양은 없다’(1999)를 통해 충무로 스타로 떠오르게 되는 화려한 미래와는 상반된 소년시절이었다. 퇴거조치가 떨어지면 철거 직전에 다른 산동네로 이사하며 재개발 지구의 이곳 저곳을 전전하곤 했다. 뒷날 방송 출연에서 "세상으로부터 우리집 형편을 가려줄 수 있는 가림막이 옆집 벽이었는데 옆집과 함께 그 벽이 없어졌다. 그때는 기분이 참 묘했다"며 "온 세상이 우리집 형편을 보는 듯 발가벗겨진 느낌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난민과 소외계층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현실 참여로 이어진다.

뒷날 ‘비트’에 출연할 때의 일이다. 김성수 감독은 7~8줄 분량으로 도입부의 내레이션을 다소 장황하게 썼는데, 이걸 받아 읽은 정우성은 “나에겐 꿈이 없었다” 한 마디로 줄이고는 “결국 이 말을 하려는 거 아닌가요”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이 한 줄에는 은행 말단직원이라도 해보고자 경기상고에 진학했지만 1학년 때 자퇴하고 말았던, 가난한 집안 환경과 진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사이에서 격렬히 진동했던 자전적인 경험이 함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영화에 그대로 반영되어 “17대 1” 운운과 더불어 시대를 풍미한 명대사가 되었다.

고객 몰고 다닌 햄버거 집 아르바이트 생


중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무렵, 정우성은 서문여중고 근처의 멕시칸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이 당시 아르바이트는 신분증 사본이나 이력서를 따로 요구하지 않았는데 184㎝의 장신이었던 정우성은 “재수생인데요”라고 속이고 일했다고 한다. 당시 이 가게는 근처의 인디안 햄버거 가게에 밀려 파리를 날리고 있었는데, 정우성이 오고 나서부터 상황이 역전되어, 인근 동덕여고와 세화여고는 물론이고 봉천동에서도 여학생들이 몰려와 가게 입구에서 화장실 들어가는 골목까지 북새통을 이루었다. 덕분에 정우성은 시급이 800원으로 오르고 보너스로 10만원씩을 받았다고 한다.

고교를 그만 둔 이후 정우성은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해결하면서 모델센터의 교육생으로 들어간다. 프리랜서 모델 활동을 겸하던 이 시기에 그는 SBS 1기 탤런트 공채에 응시했지만 학력이 고교 중퇴라는 이유로 떨어졌고 MBC 탤런트 시험에서도 낙방했다. 한 의류회사의 카탈로그 모델 고정 계약을 거절한 여파로 들어오던 모델 일이 줄어드는 후폭풍을 맞기도 했다.

그리나 압구정동 한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정우성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홍콩 영화의 열렬한 팬이었고 ‘스팅’(1973)의 로버트 레드포드를 동경했던 소년이 배우의 꿈을 현실로 이루는 순간이었다.

“‘압구정동 레스토랑에서 서빙하는 친구가 있는 데 마스크가 정말 괜찮아요.’ 지금은 싸이더스에서 가요 부문을 맡고 있는 정훈탁 이사가 1993년 누군가를 소개했다. ‘어! 야! 분위기가 꼭 홍콩배우 같다. 괜찮네. 나중에 제대로 소개해라.’ 이 홍콩 배우 닮은 친구가 바로 정우성이다.“(‘차승재의 영화 이야기’, 동아일보 2002년 1월 31일자)

당시 영화사 신씨네의 제작부장으로 있었던 차승재 전 싸이더스 대표에 의해 길거리 캐스팅으로 배우에 발탁된 정우성은 ‘구미호’(1994)의 주연으로 충무로에 첫 발을 내딛는다. 영화 경험이 없었던 이 시절의 연기는 스스로도 못 봐주겠고 할 정도였고 반응도 시원치 않았지만, 훤칠한 인상의 신인 정우성의 등장은 대번에 업계의 이목을 끌었다.


홍콩 배우 닮은 청년


영화를 준비하던 중에도 오리온의 센스민트 껌 광고와 예능 프로그램 출연 등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높여간 정우성은 허영만 화백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SBS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1995)로 “신예이지만 외로운 반항아 동석역에 제격인 외모와 분위기를 지녔다”(한겨례신문 1995년 5월 5일자)는 평을 얻으며 SBS스타상 신인상을 수상한다. 이때 ‘모래시계’로 신인상을 공동 수상하면서 이정재와 라이벌 각을 세우게 되는데, 두 사람은 나중에 ‘태양은 없다’를 함께하며 절친한 사이로 발전한다.

심은하와 공동 주연한 ‘본 투 킬’(1996)도 흥행에 죽을 쑤긴 했지만, 김성수 감독의 ‘비트’를 만나면서 정우성은 마침내 경력의 화양연화를 맞게 된다. IMF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파국을 맞았던 당시, ‘비트’에서 정우성이 연기한 민은 90년대 청춘의 집단적 감성을 한 몸에 응축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오토바이를 타면서 눈을 감은 채 두 팔을 펼치거나 조폭과의 싸움에서 치명상을 입고 길바닥에서 죽어가는 민의 고독한 모습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의 막막함 속에서 몸부림치는 청춘의 불안과 허무주의를 대변하고 있었다.

‘비트’는 서울에서 단관 개봉으로만 35만 관객을 모으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비트’의 촬영이 진행 중일 때부터 차기작 ‘태양은 없다’을 구상하고 있던 김성수 감독은 흥신소 직원 홍기를 맡은 이정재와 콤비를 이루는 복서 도철 역으로 정우성을 다시 기용한다. 풀리는 일이 없는 두 청춘의 방황을 그린 이 영화 또한 서울 관객 33만을 기록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극 중 정우성의 하와이안 셔츠 차림은 코디네이터 김유진이 재래시장에서 찾아낸 것이었는데, 처음엔 촌스럽다고 입지 않으려던 것을 “배역과 어울리니 닥치고 입으라“는 강권에 밀려 억지로 걸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해 여름 패션 유행을 선도해버렸다. 뒷날 음료수 광고에 쓰여 다양하게 패러디되는 "너 만나고부터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가! 가란 말이야!"는 원래 이 영화에서 이정재에게 날리는 대사였다. 김성수 감독과의 인연은 한국 사극 액션에 신기원을 이룩한 저주받은 걸작 ‘무사’(2001)를 거쳐 누아르 근작 ‘아수라’(2016)로까지 이어진다.


넓은 연기 폭, 성숙한 삶


이후 정우성은 청춘 스타의 범주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하며 연기의 외연을 확장해 나갔다. 일상적인 생활 연기와 사투리가 두드러진 ‘똥개’(2003), 멜로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2004),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도 액션 투혼을 불사른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과 무협영화 ‘검우강호’(2010), 기존의 이미지를 변주하면서 서늘한 냉기를 불어넣은 ‘감시자들’(2013)과 ‘마담 뺑덕’(2014), ‘더 킹’(2017)의 악역, ‘유령’(1999)에 이어 직업군인의 면모를 소화한 ‘강철비’(2017)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연기자로서의 성숙을 추구하면서 정우성은 우리 시대 한국 영화를 표상하는 존재로 거듭났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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