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한 사건은 조선왕조 최대의 굴욕이었다. 이후, 조선은 겉으로는 청의 여러 요구에 따르는 척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복수를 다짐하며 청을 정벌해 명나라를 회복시키자는 북벌론(北伐論)을 추진했다.
청나라를 적대시하던 분위기는 18세기 들어 변화를 보인다. 당시 외교 사절인 사신(使臣)의 일행으로 북경에 갔던 조선 관료와 문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북경 시내를 방문하고 청의 관리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강희제에서 건륭제를 거치며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경제ㆍ문화적 번영을 구가한 청나라의 실상을 체험한 이들을 중심으로 청의 선진 학문과 문물을 수용해 조선을 부강하게 하자는 북학론(北學論)이 대두되었다.
사신들이 구해 가져오거나 보고 듣고 경험한 청나라의 선진 문물과 학문의 제 경향은 조선 왕실에도 전해졌다. 정조(재위 1776~1800)가 청나라 건륭제(재위 1736~1796)의 ‘사고전서’ 편찬 소식을 듣고 사신들에게 이를 구해오도록 명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대신 옹정제 때인 1725년에 완성한 ‘고금도서집성’을 그 원본 격에 해당한다며 구입한 일화는 청대의 학술 동향 정보와 이를 손에 넣으려는 조선의 관심과 노력을 잘 보여준다.
서학(西學)과 북학이란 국제 문화는 조선에서 고급 취향으로 수용되어 민간으로 확산하며 책가도(冊架圖ㆍ또는 책거리도)란 조선후기 문화를 표상하는 시각미술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18세기 중반 경 북경 사행을 통해 전래된 책가도는 서양인 선교사들을 통해 확산된 서양화법을 사용해 중국식 서재를 그린 그림으로, 고동서화와 문방청완 취미의 유행과 함께 조선 후기 궁중회화와 민화의 대표적 화제로 발전하였다.
정조는 책가도의 발달과 유행, 민간으로의 저변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강관식 교수의 연구로 알려졌듯이 정조는 국왕 직속 화원 기구인 규장각 자비대령화원 제도를 만들고 이곳에 소속된 화원들을 시험하는 녹취재(祿取才)에 ‘책가(또는 책거리)’ 화제를 종종 출제해 당대 확산되던 책가도의 발달을 주도했다.
편전에 입시한 대신들에게 어좌 뒤에 펼쳐 놓은 책가도를 보여주었다는 ‘홍재전서’의 기록은 정조의 책가도에 대한 관심과 기호를 알려준다. 정조는 입시한 대신들에게 어좌 뒤 서가(書架)가 진짜가 아닌 그림이라 말하며, 정자(程子)의 “비록 책을 읽지는 못하더라도 서점에 들어가서 책을 만지기만 해도 기쁜 마음이 샘솟는다”라는 말에 공감해 평소 좋아하는 책들의 표제를 쓴 서적이 놓인 책가도를 제작하였음을 밝힌 바 있다. 진짜가 아닌 그림이라고 한 정조의 언급에서 해당 책가도가 투시도법과 명암법으로 대표되는 서양화법으로 묘사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정조가 신하들에게 보여준 책가도는 전해지지 않으나 국립고궁박물관 ‘책가도’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순조의 적통 왕세자로 정조대 문예부흥의 토양 속에서 배출된 탁월한 문신들의 보좌를 받으며 성장한 효명세자(1809~1830)는 청나라의 선진 학문과 문물 향유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대리청정 기간인 1828~1830년 사이에 제작된 ‘동궐도’에 묘사된 수많은 궁궐 전각 가운데, 벽돌 벽에 둥근 창이 난 이국적인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 벽돌 건물은 효명세자의 처소인 연영합 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중앙에는 문화각(文華閣), 동편에는 수방재(漱芳齋)란 편액이 걸려 있다.
수방재는 청대 건륭황제가 연회를 열고 연희를 즐기던 건물로 중화궁(重華宮) 동쪽에 위치했으며, 이곳에서 황제가 조선의 사신을 만나기도 했다. 문화각 또한 청대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 희화문(煕和門) 밖에 위치한 전각으로 황제의 경연이 이뤄지는 등 문한과 관련된 공간이었다. 두 건물은 북경을 다녀온 사신들이 귀국 후 왕에게 보고한 실록의 기사와 개인 문집 등에서 종종 언급되고 있다.
‘수방재’와 ‘문화각’이란 편액이 나란히 걸린, 청나라 전각을 모방한 건물은 직접 그곳을 방문할 수는 없지만 청의 궁정 문화를 조선의 궁궐 한가운데에서 몸소 즐기고자 한 효명세자의 취향과 선진 문화에 대한 동경을 엿보여 준다. 이러한 효명세자의 청 문화에 대한 기호는 사행을 통해 청의 선진 문화를 체험하고 국제 문화 예술 취향의 수용과 유행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그의 주변에 있었던 점이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주목되는 인물이 바로 조선 말기 문예를 주도한 김정희(金正喜ㆍ1786~1856)이다.
김정희는 젊은 시절 아버지인 김노경(1766~1837)을 따라 사행에 참가해 청의 저명한 노학자이자 관료인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ㆍ1733~1818)과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이후, 두 인물을 중심으로 한중 지식인의 교류가 확대되었다. 1810년 연행에서 옹방강과 인연을 맺고 김정희가 돌아 온 뒤, 서울 문인들 사이에서 옹방강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되었으며 사행을 가는 문사들은 옹방강을 만나고자 노력했다. 1812년 연행을 간 신위(申緯ㆍ1769~1847) 또한 김정희의 소개로 옹방강을 만나고 그의 서재인 소재(蘇齋)를 방문하여 귀중한 여러 자료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옹방강과 인연을 맺은 김정희와 신위는 귀국 후 조선에서도 편지로 옹방강 그리고 그의 아들 옹수곤과 교유하였다.
김정희와 신위는 각각 ‘보담재(寶覃齋)’와 ‘소재(穌齋)’를 당호(堂號)로 사용하며 담계 옹방강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본받고자 하였다. 19세기 대표적 두 문인 관료의 옹방강에 대한 추숭은 당대 조선 문화계에 소재 당호 사용의 유행, 소식을 숭배하는 숭소열(崇蘇熱), 금석학의 발달 등과 같은 문화현상을 낳았다.
김정희는 효명세자를 교육하고 보좌하는 세자시강원 관원을 지냈으며, 신위도 순조에서 헌종대에 걸쳐 고위관직에 있었기에 효명과 헌종 같은 중요 왕실 인물들은 청조의 문물 뿐아니라 옹방강과 같은 청나라의 뛰어난 문인의 학예(學藝)에 관심을 갖고 수용하고자 하였다.
1844~1845년경 헌종은 신위에게 옹방강의 서재 이름인 ‘석묵서루(石墨書樓)’로 편액을 써서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이 때 신위는 옹방강의 손자가 보내 준 옹방강의 ‘석묵서루’ 인장을 함께 왕에게 올리기도 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19세기 조선 왕실의 옹방강에 대한 관심과 존경을 엿볼 수 있는 현판 세 점이 전한다. 이중 ‘실사구시(實事求是)’ 현판은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함’이란 뜻의 ‘실사구시’를 크게 쓰고 그 옆에 작은 글자로 ‘옛 것을 고찰하고 현재를 증명하니,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사실을 밝히는 것은 책이고, 이치를 따지는 것은 마음에 있네. 하나의 근원은 둘이 아니니, 나루터에서 찾을 수 있네. 만 권 서적을 관철함은 다만 이 잠규(規箴)라네’라는 글을 적고 있다. 이어서 가경(嘉慶) 신미년(辛未ㆍ1811) 10월 옹방강이 썼다는 관서와 ‘담계’ ‘옹방강인’ 인장을 새겼다.
청대 발달한 고증학은 실사구시 정신에 토대하였고, 이에 금석학은 경학ㆍ문자학ㆍ사학ㆍ서예에 있어 필수 기초 학문이 되었다. 청대 금석학의 대가인 옹방강의 고증 정신과 그의 서체를 잘 보여주는 현판이라 하겠다. 이 현판은 창덕궁에서 전해진 것으로 어느 전각에 걸렸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조선후기 왕실의 청조 학예에 대한 경도와 지향을 잘 보여준다.
한편, 경복궁 건청궁 장안당의 출입문인 초양문(初陽門)과 집옥재 남쪽 별당인 보현당(寶賢堂)의 현판은 옹방강의 글씨를 새긴 것으로, 옹방강과 그의 학문에 대한 추숭 열기가 조선말인 고종 대까지 이어졌음을 알려준다.
이렇듯, 18세기 이후 조선말까지 이백여 년 간 조선 왕실은 청나라의 선진 문화를 수용하고 향유한 북학 취향의 선두에 있었다. 책가도, 동궐도에 묘사된 청 건물을 모방한 건축물, 저명한 청 학자인 옹방강의 글씨와 인장을 새긴 궁중 현판 등은 조선왕실의 청 문화에 대한 기호와 취향을 표상하는 물질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