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주인은 당신의 고모, 이모가 아니다

입력
2020.07.2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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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연재]<15>한국, 그 많은 형님과 아우의 세계

편집자주

한국의 정체성, 역사, 정치, 사상, 문화 등 한국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찾아 나가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칼럼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한국일보'에 3주 간격으로 월요일에 글을 씁니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스페이스 오페라, 아니 우주 막장 드라마 '스타워즈 5: 제국의 역습'의 클라이맥스.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은하계의 운명을 두고 악당 다스 베이더와 광선검 결투를 벌인다. 검은 로봇 대가리를 뒤집어 쓴 다스 베이더가 루크에게 말한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이 분쟁을 끝내고 은하계에 질서를 가져올 수 있다.”

그 정도 회유에 넘어갈 루크가 아니다. “싫어. 난 너하고 한패 안 먹어.” 바로 이때 다스 베이더는 '스타워즈' 연작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사를 던진다. “내가 니 애비다.”(I am your father) 희대의 악당이 바로 내 아버지였다니!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루크는 부르짖는다. “꽤액!” (Noooooo!)

출생의 비밀을 두고 벌어지는 막장 드라마라면, 한국이 질 수 없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벌어지는 K-스페이스 오페라의 가장 충격적인 대사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내가 니 애비다”(I am your father)가 아니라 “니가 내 애비다”(You are my father)이다.

배경은 은하계가 아니라 한국의 한 레스토랑. K는 모처럼 근사한 식사를 해볼 마음으로 지인들과 함께 정갈한 레스토랑을 찾았다. 앉자마자 K는 종업원에게 말을 건넨다. “여기 물 한잔 가져다 주실 수 있나요?” 종업원이 친절하게 대답한다. “네 아버님 (You are my father), 곧 갖다 드리겠습니다.” “꽤액!”

아버님이라니! 아들이라고 할만한 유기체가 없어서 인생의 큰 번뇌를 벗었다고 생각하는 K에게 아버님 운운하다니, 세상에! 저 젊은이는 혹시 어디선가 잉태되어 조용히 자라다가 문득 나타난 K의 옛 정자(精子)인 걸까. 아버님, 저는 인간이 되기 전에 한때 당신의 정자였습니다. 물을 가져다드릴 테니 제게 유산을 주십시오, 이러자는 심산인 걸까.

음, 유산이라니, K가 시대를 잘 만나 별 힘들이지 않고 아파트 장만을 한 것을 알기라도 하는 걸까. K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아버님이라고 부른 종업원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접객을 담당하기에 걸맞은 깔끔하고 단정한 외모와 적극적인 태도. 매사에 소극적인 K와 유전자를 공유할 가능성은 아무래도 희박해 보였다.

“밥맛 떨어지니까 아버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차마 이렇게 말하지는 못하였다. 저 청년이 K를 아버님이라고 부른 것은 손님에게 그저 친근감을 표시하기 위해서였을 수 있다. 혹은, 단순히 한국 사회의 관습을 따른 것일 뿐일 수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직무 교육을 그렇게 받았을 수 있다. 이 업장에서는 중년의 남자 손님에게는 “아버님”이라고 하고, 중년의 여자 손님에게는 “어머님”이라고 부를 것, 등등.

K를 아버님이라고 불렀으니, K 역시 그 종업원을 “자식” 취급하면 어떨까. “자식 같아서 하는 말인데, 벌어놓은 돈은 좀 있나?” 실실 말을 놓는 K를 보고 청년의 표정은 일그러질 것이다. “아, 자식 같아서 물어본 거야. 신체의 발육은 잘 진행되고 있나. 살 집이라도 한 채 마련해 놓았나? 아직 안 했으면 언제 하려고?” 마침내 종업원의 얼굴은 굳어진다. 이제 그는 K가 달라고 한 물을 10초 안에 가져와서 K의 얼굴에 끼얹을 것이다. 1초, 2초, 3초, 4초.... 촤악!

실로, 한국 사회에서는 아무런 피를 섞지 않았어도 상대를 어머님, 아버님, 형님, 누님, 언니라고 불러대지 않나. 이를테면, 식당에 가서 거리낌 없이 주인장을 “고모” “이모”라고 부르지 않나. 실제 식당이나 술집 중에 고모집, 이모집과 같은 간판을 단 곳도 적지 않다. 지금의 기성세대 상당수는 그러한 술집에서 만나 거나하게 술판을 벌인 기억이 있다. 그리고, 학창 시절에 아무런 교유를 한 적이 없었음에도,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호형호제하고 초면에 말을 놓은 기억이 있다.

많은 이들이 “인간적이다”라고 칭찬하는 이런 분위기의 클라이맥스는 역시 “외상”이다. 기성세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러한 술집에서 돈도 없이 거나해지도록 술을 퍼마신 뒤, 술값 대신 학생증이나 신분증을 맡겼던 것이다. 보기에 따라, 이러한 외상은 미담이 되기도 한다. 학창 시절 그렇게 외상을 하며 술을 퍼마시다가 어느덧 사회의 중견이 된 졸업생들이 뒤늦게 자신들의 30년 전 외상값을 갚기를 자청한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외상값을 받은 “고모”(주인장)는 그 외상값 전액을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학교에 기부했다는 미담이 신문 기사화된 적이 있다.

이렇게 근친을 넘어선 대상에까지 친족 명칭을 사용해가며, 공적 관계를 유사 가족 관계로 만드는 데는, 당신과 나는 계약을 통해 맺어지는 “기계적” 관계가 아니라, “유기적인” 공동체의 일원이고 싶다는 열망이 깔려 있다. 정치학자 유홍림의 분석에 따르면, 그러한 공동체의 매력은 “이해타산적인 메마른 합리성이 아닌 정서적 유대와 귀속감, 상호의존과 통합, 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공동체적 의무감”에 있다. 다시 말하면, (유사) 가족적 호칭은 당신과는 서로 치댈 수 있을 만큼 끈끈한 관계라는 선언 혹은 제언이다.

날파리를 잡을 때 끈끈이가 소중하듯이, 끈끈한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공동체적 유대감이 강한 가족이 있을 것이고, 혈연관계 이상으로 친밀한 유대를 쌓은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부실한 사회적 안전망 속에서 각자도생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역설적으로 끈끈이를 더 열망하고 사랑할 수도 있다.

끈끈이를 사랑한 나머지 공식 회의 석상에서도 상대를 공식 호칭으로 부르기보다는 “아무개 형”이라 부르기도 한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서울시장은 기자간담회장에서 한 지자체장을 일러 “내 아우다”라고 한 적이 있고, 서울시장의 사망 소식을 접한 지자체장은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홀연히 가버린 형님이 밉다”고 애도한 바 있다.

이러한 끈적한 유기체적 공동체관은 국가가 사회적 복지를 감당할 수 없었던 시절로 소급될 수 있다. 사회보장제도를 본격적으로 감당할 정도로 국가 기구가 발전하지 못했을 당시에는, 인간의 생로병사에 필요한 서비스의 상당 부분이 민간으로 이관될 수밖에 없었다.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체나 기업이 부재하거나 부족했던 상황에서는 특히 가족이 그 서비스를 떠맡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오늘날 상상할 수 있는 가족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조직을 구축한 결과가 이른바 가문이다. 조선 시대에 국가 이외의 가장 강력한 조직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가문이라 불리는 (유사) 가족 조직이다.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배경 속에서 가문이 공동체 정신 혹은 상호부조라는 명분 하에 역병 구제, 기근 구제, 치안, 대부 등 여러 공적 기능을 떠맡아야 했다.

현대 한국의 국가와 시민단체는 과거에 비해 풍부해진 자원을 활용하여 한때 가문이 제공하던 복지 기능을 자임하게 되었다. 그 확대된 공적 관계의 저변에서 유사 가족의 언어는 각자도생 중인 인간들을 여전히 끈끈하게 묶고 싶어한다.

그 과정에서 공사(公私) 구분은 희미해지고, 계약서는 제대로 작성되지 않고, 직무는 정확히 정의되지 않는다. 유홍림에 따르면, “혼란을 공동체 의식에 호소함으로써 극복하려는 시도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특히 약자는 계약서의 조항보다는 강자의 가변적인 선의에 의존하게 된다.

실로, 잔존하는 공동체 의식의 저변에는 미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장학금을 기부한 “고모”는 외상을 준 “고모”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약 30년 전 그 외상의 부담을 안았던 당시의 “고모”는 “가게가 어려워진 데다 건강까지 나빠져” 혈연 관계가 아닌 현재의 “고모”에게 가게를 넘겼고 연락이 끊겼다. 가게를 넘길 때, “학생들이 술값 대신 맡기고 간 뒤 찾아가지 않은 학생증 수백 장”이 고스란히 남았다. 미담의 경제적 기초를 제공했던 원조 “고모”는 병마와 가난에 싸우다가 돌아가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꽤액!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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