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을 대리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의 ‘형제의 난’ 에 뛰어들었던 민유성 전 산업은행장이 신 전 부회장을 상대로 자문료를 더 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가, 재판에서 패소한 것은 물론 형사처벌 위기까지 내몰렸다. 민사사건 재판부에서 이례적으로 민 전 행장이 변호사법을 위반했다며 형사적 판단까지 내렸기 때문이다.
나무코프 대표인 민유성 전 행장과 SDJ코퍼레이션 회장이던 신 전 부회장의 악연은 롯데그룹의 경영권 분쟁이 한창이던 2015년 시작됐다. 민 전 행장은 그해 9월 신동빈 회장에게 부정적 여론을 조성하고 롯데의 주요 사업을 방해할 목적으로 신동주 전 부회장과 ‘프로젝트 L’ 이라고 명명된 경영자문 계약을 체결했다. 같은 해 11월 롯데가 월드타워 면세점 심사에서 탈락하는 등 신동주 전 부회장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자, 민 전 행장과 신 전 부회장은 ‘프로젝트 L-변경자문계약’을 맺으면서 ‘면세점 면허 갱신 방해’ 등을 구체적인 자문성과로 명시했다.
그러나 2016년 12월 롯데가 월드타워 면세점 사업자로 재선정된 데 이어, 신동빈 회장이 경영권 분쟁에서도 승리하자, 신 전 부회장은 2017년 8월 민유성 전 행장 측에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민 전 행장은 그러자 2018년 1월 신동주 전 부회장을 상대로 "자문료로 (이미) 받은 182억원에 추가해 108억원을 더 달라"며 용역비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선 "신 전 부회장이 75억원을 지급하라"며 민 전 행장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지난 8일 2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민사34부는 "신동주 전 부회장은 민 전 행장에게 한 푼도 줄 필요가 없다"며 1심 판결을 완전히 뒤집었다. 민 전 행장 입장에선 거액을 챙길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재판부가 민 전 행장의 자문행위가 변호사법 위반이라고 판단해 형사적으로도 위법 소지가 크다고 밝힌 부분이다. 민사사건 재판부가 사건 당사자의 행위에 대해 형사 판단까지 내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판결문에 따르면 2심 재판부는 신동주 전 부회장에에 약속한 나무코프의 경영자문 행태가 정상적인 자문 범위를 넘어선 법률사무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나무코프가 계약에 따라 수행한 자문용역의 주된 업무는 법적 분쟁에 관한 조언 및 정보제공 등 법률사무를 수행하고, 그 대가를 수령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며 “이는 반사회적 법률행위에 해당해 무효”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특히 ‘프로젝트 L’을 언급하면서 민 전 행장의 위법행위를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재판부는 "나무코프는 SDJ와 2단계 자문용역 계약을 체결하면서, 신 전 부회장의 롯데그룹 경영권 회복이란 궁극적 목적 달성을 위해 ‘면세점 특허 재취득 탈락’ ‘신동빈 회장에 대한 법정구속 내지 무죄판결의 선고’ 등을 주된 목표로 설정했다”며 “이는 변호사법 109조 1호에 의해 금지된 법률사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밝혔다.
변호사법 109조 1호는 변호사가 아니면서 금품ㆍ향응 또는 그 밖의 이익을 받거나 받을 것을 약속하고 소송ㆍ수사 등 사건에 관해 감정ㆍ대리ㆍ중재ㆍ화해ㆍ청탁ㆍ법률상담 또는 법률관계 문서 작성, 그 밖의 법률사무를 취급하거나 행위를 알선하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재판부는 △‘프로젝트 L’ 계약서에 ‘법무(Legal)’가 명시된 점 △(2015년 9월 체결된) 1단계 자문용역 계약에 따른 업무를 수행할 때도 롯데쇼핑에 대한 회계장부 열람ㆍ등사 가처분 신청을 하는 등 신동빈 회장 내지 롯데그룹의 경영상 비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 이 내용이 언론에 공표되면서 수사가 개시된 것으로 보이는 점 △민 전 행장이 변호사 2명 및 신 전 부회장과 4자간 계약을 체결하고, 변호사들에게 구체적인 업무를 분배ㆍ지시하고 보고를 받으면서 의견을 표시한 점 등을 변호사법 위반 행위의 근거로 제시했다.
재판부 판단대로라면 민유성 전 행장은 1심에서 인정한 자문료 75억원을 날린 것에 더해, 형사처벌까지 감수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롯데그룹 노조는 지난달 민 전 행장을 변호사법 위반과 알선수재 등 혐의로 이미 고발한 상태다. 노조는 2심 판결 직후인 지난 13일 검찰에 제출한 고발장 보충서를 통해 “법원이 ‘프로젝트 L’ 양해각서의 면세점 면허갱신 방해 등이 법률사무라고 밝힌 이상, 민 전 행장의 변호사법 위반 혐의를 철저히 수사해 달라”고 요구했다.
롯데그룹에 몸담았던 전직 임원은 "민 전 행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은 돈 문제 때문에 법적 다툼을 벌이고 있지만, 롯데 입장에서 보면 불순한 의도를 갖고 공모해서 회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사람들일 뿐"이라고 말했다.
민유성 전 행장은 시티은행 뉴욕본점 기업재무분석부 부장, 우리금융지주 부회장, 리먼 브라더스 서울지점 대표를 거친 민간 금융인 출신으로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장으로 발탁돼 화제가 됐다. 2011년 산업은행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사모펀드(PE) 운용사인 티스톤 파트너스와 나무코프 회장으로 활동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