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을 개혁하느니 서독으로 탈출을 택했던 동독 주민들

입력
2020.07.1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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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89년 동독민주혁명

편집자주

2020년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6ㆍ15공동선언 20주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분단의 비극은 북핵 위험으로 더 증폭된 듯 하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가 독일 경험을 통해 한반도 평화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글을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서 연재한다.


“말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 대화 도중 프랑스 혁명의 영향에 대해 물었을 때 자우언라이 총리의 답이었다. 그것은 한동안 중국 정치가들의 장기적 안목이라며 주목을 받았고 독특한 중국인들의 시간관념으로 자주 인용됐다. 하지만 2011년 미국의 전직 외교관 챠스 프리먼은 그 말이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알렸다. 닉슨이 물은 건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었는데, 저우언라이는 1968년의 프랑스 5월 청년봉기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오해 내지 실수로 생겨난 동양의 장기적 역사관 신화였지만 때로 사건의 충격에 직면에 우리는 자우언라이의 ‘통찰’에 의지하고 싶다.

1989년 동독과 동유럽 민주혁명도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미 30년이나 지났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30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승부가 난 줄 알았는데 후반전이 아직 남은 듯하다. 2019년 가을 독일의 동부 지역에서는 '우리가 인민이다'가 다시 울려 퍼졌다. 그것은 1989년 가을 동독 공산주의 체제에 맞선 저항을 기념하기 위함이 아니라 현재의 독일 체제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ㆍAfD)'은 30년 전의 반체제 저항 구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현존 독일 민주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극우 정치의 선동에 나섰다.

2013년에 창립된 우파 포퓰리즘 정당 AfD는 이미 2017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12.6%의 지지를 얻어 제3당이자 제1야당의 지위를 차지했다. 당시 선거에서 동독 지역은 서독 지역에 비해 AfD에게 두 배나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동독의 4개주에서 AfD는 18.6%에서 22.7%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제2당으로 발돋움했고, 작센 주에서는 27%를 얻어 제1당이 됐다. 2019년 9월 1일 주 의회 선거에서 브란덴부르크 AfD는 23.5%, 작센 주의 AfD는 27.5%, 10월 27일 주 의회 선거에서 튀링엔주의 AfD는 23.4를 각각 확보했다. ‘통일위기’가 ‘민주주의 위기’로 전화하고 있었다. AfD의 ‘전환을 종결짓자’는 선동과 결집 구호는 1989년의 ‘전환’ 내지 ‘혁명’에 대한 인습적 평가를 흔들었다. 1989년 가을의 민주혁명은 1990년 10월 3일 독일통일로 ‘완성’된 것도 아니고 ‘종점’에 달했던 것도 아니었다. 최근 동독 지역 주민들의 체제 이반 흐름은 이미 1989년 혁명에 내재했다.

1989년 들어 동독 주민들이 가장 먼저 취한 체제 거부 행위는 여전히 동독 탈출이었다. 이미 1989년 초 호네커는 베를린 장벽이 백년이 지나도 계속 존속할 것이라고 뻗대었기에 동독 주민들은 동독에서 더 이상 삶의 전망을 찾을 수 없다고 보았고 대량탈주로 답했다. 동독 정권에 맞서 '우리도 나가기를 원한다, 자유를 달라!'며 짐을 싸는 동독 주민들이 계속 늘어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점차 ‘신포럼'이라는 반체제 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집회와 시위가 조직됐다. 9월 중순 들어 동독 전역에서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체제 비판과 저항 운동을 독려하는 단체가 결성됐다. 애초 소규모로 시작된 라이프치히 시 니콜라이 교회의 촛불 시위에는 10월 9일 7만명, 23일 30만명이 참여했다. 그들은 '우리는 여기 머문다'거나 '떠나야 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지배자들'이라고 목을 놓았다. 특히 '우리가 인민이다'라는 구호가 동독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졌다.

10월 내내 나라 전체가 시위를 배웠고 혁명을 실천했다. 10월 한 달 동안 동독 171개 시와 군에서 330회의 시위와 집회가 벌어졌다. 상황은 가속화됐다. 급기야 다른 도시에 비해 잠잠했던 동독 수도 베를린에서도 11월 4일 30만에 달하는 군중이 모여들어 동독 체제의 숨통을 조였다. 11월 1일부터 9일까지 개최된 며칠간의 시위와 집회는 이미 10월 한 달 동안의 시위와 집회 수를 능가했다. 혁명은 단지 소수의 지배 엘리트에 대항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침묵하는 다수를 흡수하는 실천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런데 1989년 가을 동독의 체제 비판 운동이 동독 권력자들과 본격적인 정치적 대결을 벌일 때 통일 문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동독 반체제운동은 민주화 요구와 체제 개혁의 강령에 집중했다. 동독 반체제 세력의 주요 관심은 동독의 민주주의적 개혁 및 그에 기초해 새롭게 갱신된 동독의 독자적 국가로서의 지속적 발전이었다. 동독 반체제 운동은 '제3의 길' 지향과 통일이 아닌 방식의 양독 간 결합을 모색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반체제 운동가들이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흐름을 '건달세상 운동'이라며 경멸했다는 점이다. 반체제 운동가들에게는 서독 또한 동독 못지않게 문제와 결함투성이의 나라였다. 반체제 운동가들과 동독을 탈출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일시적으로나마 협력이나 상호 이해도 없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긴장과 거리가 뚜렷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서독에 대한 태도가 확연히 달랐다. 동독의 향방을 결정지은 것은 이 양자의 서로 다른 영향력이었다.

’제3의 길‘을 내세운 움직임은 1989년 11월 26일의 ‘우리나라를 위한 호소’ 선언과 그것에 대한 지지 서명 운동으로 대표됐다. 그것은 콘라트 바이스, 프리드리히 숄렘머, 울리케 포퍼, 슈테판 하임과 크리스타 볼프 같은 동독의 대표적인 비판 작가와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 서독과 공산주의 동독 사이의 중간적 길을 대안으로 내세웠고, 서독 자본주의에 흡수되는 동독의 운명에 대항해 민주적으로 갱신된 대안적 동독에 대한 희망을 일깨웠다.

1989년 가을과 겨울 동독의 체제 비판 운동 단체들은 민주혁명 초기에 기층 민주주의 성격과 분산성으로 인해 동독 공권력의 억압에 맞서는 데에서 장점을 갖고 있었다. 반면 기층 민주성과 탈집중성은 정치적 목적을 관철하고 힘을 발휘하는 데는 약점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강령적 요구를 통일해 특정 국면에서 정세를 주도하기 어려웠고 지도적 인물을 중심으로 내세우기도 간단치 않았기 때문이다. 체제 비판 운동은 명료한 강령과 단일한 지도력 대신 토론하고 합의하여 최소 공통분모를 찾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제3의 길’보다는 서독에 의존하는 동독 주민들이 늘어갔다. 서독 정부와 동독 주민 간의 상호작용으로 통일 과정이 결정되는 동안 동독의 반체제 단체들은 점차 주변적인 존재로 내몰렸다. 1989, 1990년 겨울 동독의 반체제 운동이 여전히 ‘민주 사회주의’에 매달려 ‘제3의 길’을 모색하는 동안 다수의 동독 주민들은 점차 상황을 더욱 밀고 나갔다. 이미 오랫동안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접하고 방문과 교류를 통해 직접 경험했던 서독의 풍요와 복지 이미지는 동독 주민들에게 막강한 흡인력을 행사했다. 특히 동서독 간 소비재의 현격한 격차는 시장경제과 계획경제의 근본적 차이를 실감하게 했다. 서독의 자유와 복지 및 풍요에 동참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는 동독 주민들로 하여금 점점 더 체제 비판가들의 ‘갱신된 동독’ 구상을 뛰어 넘어 새로운 민족적 대안으로 경도되게 만들었다. 점차 동독 반체제 운동의 다수와 동독 주민들 다수 사이에 통일 문제를 둘러싸고 이견이 두드러졌다. 동독 주민들 다수에게 전환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더 나은 물질적 풍요를 위한 ‘소비혁명’이기도 했다.

반면 1990년 1월과 2월 상당수의 반체제 운동가들은 뒤늦게 ‘국가연합’안을 되살려 급속한 통일을 막고 두 국가 상태를 상당 기간 유지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당시 ‘국가연합’안은 이제 더 이상 통일의 길이 아니라 통일 반대 구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결국 1990년 2월 말 신포럼조차도 내부의 격렬한 논쟁 끝에 ‘제3의 길’과 동독 국가 유지 노선을 포기하고 통일 흐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결국 1989년 동독 민주혁명에는 여러 흐름들이 존재했다. 혁명 안에 또 다른 혁명이 일었다. 문제는 반체제 운동가들의 ‘제3의 길’ 지향이든 다수 동독 주민들의 ‘소비혁명’이든 모두 1990년 독일통일로 완성되거나 종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와 민주주의 제도 확립이라는 의미 있는 성취 뒤꼍의 다양한 지향과 욕구를 뭉개는 한 이 역사는 닫히지 않는다. 분출됐지만 충족되지 못한 채 방향을 잃은 물줄기에는 항상 독소가 생겨난다. 1989년 혁명의 영향?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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