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계 병폐가 또 불거졌다.
트라이애슬론(철인3종) 국가대표 출신 최숙현 선수가 지속적인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2019년 1월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의 용기 있는 폭로로 시작된 스포츠계 ‘미투’ 이후 정부는 부랴부랴 폭력ㆍ성폭력 등 인권침해 근절 대책을 수립하고, 대한체육회와 체육단체 지도자들은 잇단 결의문을 발표했지만 뿌리 깊은 관행을 뽑기엔 역부족이었다.
최 선수는 경주시청 소속일 때 수년간 감독과 팀 닥터, 선배로부터 폭언과 폭행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최 선수가 생전에 기록한 녹취록에는 그들로부터 폭행과 인격모독을 당하는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욕설은 기본이고, 가혹행위도 일삼았다. 트라이애슬론은 체급 경기가 아닌데도 체중이 늘었다는 이유로 3일이나 굶기는가 하면, 슬리퍼로 뺨을 때리기도 했다. 또 감독 몰래 음식을 먹었다는 이유로 빵을 20만원어치 사 온 다음 그걸 다 먹어야 재우는 가혹행위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녹취록에는 감독과 팀닥터가 고인을 폭행하며 술을 마시는 장면도 담겨있다.
특히 트라이애슬론팀이 임시 고용한 물리치료사 ‘팀닥터’에 대한 금전 의혹도 제기됐다. 최 선수는 생전에 “2015, 2016년 뉴질랜드 훈련 당시 정확한 용도를 밝히지 않은 채 돈을 요구했다. 2019년 2개월간의 뉴질랜드 전지훈련 기간에는 심리치료비 등 명목으로 130만원을 받아 갔다”면서 “(영향력 있는) 팀닥터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고 정확한 용도가 무엇인지도 물을 수 없었다”라고 주장했다. 고인과 고인 가족 명의의 통장에서 팀닥터에게 이체한 금액은 약 1,500만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부당한 대우를 견디다 못한 최 선수는 대한체육회, 대한철인3종협회, 경북체육회, 경주시청, 경주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모든 걸 체념한 최 선수는 결국 휴대전화로 어머니에게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지난달 26일 부산 숙소에서 세상을 등졌다. 이에 최 선수의 지인들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트라이애슬론 유망주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바란다”는 글을 올렸다.
최 선수의 안타까운 소식이 뒤늦게 알려지자 문재인 대통령은 2일 “피해자 최숙현 선수가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에 접수한 날짜가 4월 8일인데 제대로 조치되지 않아 불행한 일이 일어난 것은 정말 문제”라고 하면서 최윤희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나서 전반적인 스포츠 인권 문제를 챙기라고 지시했다. 문 대통령은 또한 “향후 스포츠 인권 관련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철저히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한체육회는 이 사건을 4월 8일 처음 접수 받았다고 인정하면서 “수사권이 없어 조사에 한계가 있었다”고 둘러댔다. 체육회 관계자는 “수사 권한이 없어 선수가 훈련을 중지하고 조사를 받을 수 없었고, 연락도 자주 이뤄지지 못했다”며 “진술을 뒷받침할 증빙자료를 요청했지만 현재 유족이 언론에 공개한 녹취록 등 자료는 경찰 조사가 진행 중인 상황이라 줄 수 없으니 그 이후에 준다고 했다”고 해명했다.
그 동안 조사에 미온적이었던 경주시체육회는 이날 오후에서야 인사위원회를 소집해 최 선수를 괴롭힌 감독을 직무 정지했다.
문체부는 최 선수의 사망 사건과 관련해 최윤희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특별조사단을 구성하기로 했다. 최 차관은 이날 오후 대한체육회를 방문해 경위를 보고 받고 강력한 후속 조치를 주문했다. 최 차관은 “선수 출신으로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에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분노한다”며 “이 사태에 가장 앞장서 책임지고 다시는 이런 안타까운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문체부는 다음달 출범 예정인 스포츠윤리센터를 통해 스포츠계의 비리 및 인권침해 사례에 관해 신고접수 및 조사, 상담, 법률지원, 실태조사, 예방 교육 등을 독립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할 예정이라고도 밝혔다. 체육계 관계자는 “윤리센터에서만큼은 수사권 있는 사람들이 조사에 적극 나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