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도 포격으로 무너졌어요!”
지난달 12일 제주시 천주교 제주교구 이주사목센터(제주나오미센터)에서 만난 예멘 출신 나집(53)씨는 아직도 ‘6년 전 그날’만 생각하면 몸서리를 친다. 2014년 9월, 예멘 수도 사나의 시민들은 매일 총격과 포격 소리를 들으며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무함마드 알리 알 후티가 이끄는 반군(후티반군)이 예멘 정부와 만수르 하디 대통령에 대한 본격적 공격에 나섰던 것이다. 현재까지 7년째 이어지는 예멘 내전의 시작이었다. 그때의 시가전으로 사나 시내의 수많은 건물이 파괴됐고, 상당수 시민들이 숨지거나 집과 일터를 잃었다.
나집씨의 목소리는 유난히 컸다. 고함에 가까울 정도였다. 당시 청력을 잃었던 탓이다. 그는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쾅’ 소리가 나더니 집이 무너져 내렸다”며 “본능적으로 재빨리 집밖으로 나왔으나 이마와 팔목, 팔에 부상을 입어 수술을 했다”고 말했다.
엎친 데 덮친 격, 그 이후엔 사나를 장악한 후티반군의 표적이 됐다. 폭력반대 단체 ‘다르 알 살람(평화의 집)’에서 일했던 전력 때문이었다. “약 4년간 도피 생활을 하다 2018년 5월 가까스로 예멘을 탈출했어요. 오만과 말레이시아를 거쳐 제주로 들어왔죠.” 한 달간 비자 없이 체류할 수 있는 무사증 제도 덕분이었다. 나집씨처럼 같은 해 제주를 찾은 예멘인은 총 602명. 대부분 고향에서 삶의 터전을 잃었거나 후티반군의 징집을 거부했던 이들이다.
제주 입도와 함께 맞닥뜨린 건 한국인들의 ‘싸늘한 시선’이었다고 나집씨는 회상했다. 실제로 무슬림의 대규모 이주를 처음 접한 한국 사회에는 ‘예멘인 체류를 막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인터넷 공간엔 근거 없는 소문이 가득했다. ‘무슬림 난민은 다른 종교인한테 폭력을 휘두른다’ ‘예멘 난민들은 테러리스트’ ‘무슬림은 여성을 성폭행한다’ 등의 내용이었다. 당시 한국리서치의 ‘예멘 난민에 대한 한국사회 인식 보고서’에 따르면 예멘인 수용 찬성 입장은 24%에 그친 반면, 반대는 두 배가 넘는 56%로 나타났다.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 청원에는 무려 70만명이 동의했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 도착한 아헤드(가명ㆍ34)씨의 경험담은 좀 더 구체적이다. 지난달 13일 제주 삼도동 거리에서 만난 그는 이렇게 운을 뗐다. “구글 번역기를 돌려서 (우리에 대한) 기사 댓글들을 읽어 봤어요. 한국인들이 우리를 싫어한다는 게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제주출입국ㆍ외국인청의) 교육 내용도 ‘한국 여자를 쳐다보지 말고, 말을 걸면 안 된다’는 내용이었으니, 우리가 (한국인에겐) 경계 대상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죠.”
얼마 지나지 않아 아헤드씨는 그러한 분위기를 실감했다. 그는 “한 종교단체가 제공한 아파트에 임시 거주하던 예멘인 12명이 주민회의 반발로 숙소를 옮기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전했다. ‘제주 애월읍 소재 펜션에 예멘인 100여명을 수용한다’는 소문이 돌자, 인근 초등학교 학부모들이 자녀의 등교 거부에 나서 결국 해당 계획이 철회됐다는 말을 건네들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일부 예멘인은 외출 시 자신의 사진과 이름, ‘본 예멘인은 교육을 받고 있는 안전한 사람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안전증’을 목에 걸고 다녔다. 밤에는 외출하지 말라는 교육도 받았다. 모두 ‘한국인들이 무서워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예멘인 수용 반대 목소리의 밑바닥에 깔린 건 결국 ‘무슬림 혐오’다. ‘무슬림은 비이슬람 사회에 침투해 제도와 문화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꾸려 하고, 여의치 않으면 범법과 집단 행동을 일삼는다’는 선입견이 그 이유다. 한국 사회의 이러한 정서를 의식한 탓인지, 2018년 12월 법무부 제주출입국ㆍ외국인청은 같은 해 상반기 난민 신청을 했던 예멘인 484명 가운데 딱 2명만 난민 지위를 인정해줬다. 412명은 인도적 체류 허가라도 받았지만, 56명은 아예 난민 불인정자가 됐다. 나머지 14명은 신청을 철회하거나, 출국 후 재입국을 하지 않은 경우였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지금, 한국에 남은 예멘인들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지난달 12, 13일 이틀에 걸쳐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찾았다.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고 서귀포 남원읍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모하메드(36)씨. 그를 만난 곳은 그의 아들이 올해 초부터 다니고 있는 어린이집 앞이었다. 아들이 하원을 준비하는 동안, 한국의 첫 인상과 2년간의 제주 생활 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모하메드씨는 우선 ‘무슬림은 비(非)이슬람 문화에 배타적’이라는 편견을 바로잡고 싶다고 했다. “이슬람은 다른 문화,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사이좋게 어울려 지내라고 가르쳐요. 한국에 왔으니 이곳의 규칙과 법을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다음 말을 이어가려던 때, 아들 함자(3)가 아빠에게 달려왔다. 해당 어린이집은 원불교가 운영하는 곳. 모하메드씨에게 ‘혹시 아들이 타(他)종교 교리를 배울 수도 있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종교적 가르침의 내용은 큰 틀에선 비슷비슷해요. 사랑과 베풂의 정신을 배우면 아이 교육에도 좋을 거예요.”
모하메드씨의 집으로 이동했다. 어린이집에서 차량으로 5분 정도 거리였다. 거실과 방 한 칸이 있는 작은 집에 들어서자 그의 아내가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생후 8개월쯤인, 그러니까 한국에서 태어난 딸도 함께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아내는 시원한 차 한잔을 대접해 주었다. 살림살이도, 손님을 맞는 모습도 한국의 여느 가정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먼저 제주에서의 일상부터 물었다. 모하메드씨는 “지역 협동조합에서 감귤 박스를 포장하고, 이를 컨테이너에 옮겨 싣는 일을 하고 있다”며 “주5일 일하고 세후 180만원을 월급으로 받는다”고 밝혔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의 월세 45만원(보증금 200만원)도 본인 월급으로 직접 낸다. ‘우리 세금으로 왜 난민이 먹고 사느냐’는 일부의 비난과는 다른 모습이다.
한국 문화에도 적응하려 노력 중이다. 일을 쉬는 매주 금요일, 버스로 왕복 3시간 거리를 오가며 제주나오미센터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는다. 모하메드씨는 “한국에 왔으니 한국어, 한국 문화를 배우는 건 당연한 일”이라며 “앞으로도 기회가 닿을 때까지 수업을 들으려 한다”고 말했다.
제주시 삼도동의 할랄(Halalㆍ무슬림에게 허용된 것) 음식점 ‘아살람 레스토랑’을 운영 중인 아민(36)씨도 한국 사회에 순조롭게 정착하고 있다. 지난해 9월에는 한국인 하민경(40)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게다가 하씨는 천주교 신자다. 아민씨는 “아내가 믿는 종교를 존중한다”며 “‘무슬림은 배우자를 무조건 개종시키려 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퍼져 있는데, 사실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씨도 옆에서 거들었다. “남편은 제가 무교였으면 결혼하지 않았을 거래요. 종교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로 ‘좋은 사람’으로 비쳤나 봐요. 제가 미사를 빠지면 오히려 ‘빨리 성당에 가라’고 재촉할 정도예요.”
이들 외에도 기자가 만난 예멘인들은 모두 한국사회의 엄연한 일원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일상도 한국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 주5일 직장에 나가고, 주말에는 친구들과 여가를 즐긴다. 예컨대 1년째 유리 공장에서 근무 중인 요셉(26)씨는 “한국인 직장 동료들과 축구를 하거나, 한국인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며 주말을 보낸다”고 했다. 현재 직장 이전에도 식당(3개월)과 농장(6개월)에서 일했는데, 결국 제주에 온 이후 ‘실업자’였던 적은 없었던 셈이다.
예멘인들이 제주에만 거주하는 것도 아니다. 일부 예멘인들은 육지로 나와 부산, 거제 등에 위치한 공장과 조선소에서 일하며 한국사회에 녹아들었다. 요셉씨는 ‘화합’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슬람교 신자들을 폭력적 집단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는데, 대다수 예멘인들은 한국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한국인과 예멘인 사이에 싸움이 났다는 얘기는 2년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한국 사회에 적응하려는 예멘인들의 노력에도 불구, 지금까지도 이들을 배척하고 있는 한국인들은 일부 존재한다. 심지어 ‘인도적 체류 허가자’라는 불안정한 신분을 악용하는 고용주도 있었다.
후티반군의 징집 명령을 피해 제주에 왔다는 오마르(가명ㆍ31)씨의 사례가 그렇다. 지난달 12일 기자와 만나기 직전, 그는 제주시에 있는 ‘광주지방고용노동청 제주근로개선지도센터’를 다녀왔다고 했다. 오마르씨는 “한국식당에서 지난해 4월 28일 1년 계약을 맺고 일을 시작했는데, 사장이 올해 4월 15일 갑자기 일을 그만두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사측은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운영이 어려워진 탓에 그에게 여러 차례 일을 그만둬야 한다고 사전에 알렸다”는 입장이다.
양측 입장이 팽팽하지만, 신분이 불안한 사회적 약자들은 이런 일을 종종 겪는다. 현행법상 근속기간 1년이 넘으면 퇴직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일부 고용주가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고 계약기간 만료 직전에 직원을 해고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오마르씨는 이전 직장에서도 차별을 경험했다고 했다. “아침에 전 직원이 돌아가며 식당 바닥을 청소하는 게 규칙이었는데, 한국인 동료들은 계속 저한테만 그 일을 시켰어요. 또 원래 제 업무는 서빙이었는데, 자꾸 다른 일을 추가하더라고요. 딱히 꼬집어 말할 순 없어도 미묘한 차별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나마 오마르씨는 대놓고 비난을 당한 경험까진 없어서 사정이 나은 편이다. 예멘인들과 직접 대면하지 않는 곳에선 더욱 노골적인 ‘차별과 비난’의 언어 폭력이 행해진다. 아민씨와 하민경씨의 결혼 소식이 언론 보도로 알려지자, 일부 네티즌이 원색적인 악성 댓글(악플)을 퍼부은 게 대표적이다. “본국에 돌아가면 본처와 자식이 있을 것” “난민이 한국에 정착하려고 한국 여자와 결혼했다” “분명 몇 년 후에 아내를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가 개종시킬 것” 등의 악플이었다. 하씨는 이와 관련한 대화를 나누다 잠시 뜸을 들이고는 “남편에겐 댓글 얘기를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몰랐으면 좋겠다”면서 “왜 그런 글이 쏟아지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민씨에게 향후 아내와 예멘에 살 계획이 있는지 넌지시 물었다. “아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절대 예멘에서 살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나 막상 제주의 예멘인들은 이러한 일상 속 차별과 비난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요셉씨는 “대부분의 한국인은 보도를 통해서 아랍 소식을 접할 수밖에 없는데, 언론에는 이슬람원리주의 무장세력이 주로 노출된다”며 “무슬림에 선입견을 갖게 된 건 이해할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모하메드씨도 “집을 떠나면 가치가 떨어진다”는 예멘 속담을 들려주며 웃어넘겼다.
오히려 그들은 제주 정착에 도움을 준 한국인들과 지역 사회에 고마움을 표했다. 특히 거주 문제를 해결해 준 데 대해선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모하메드씨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노숙해야 할 상황까지 몰렸는데, 모니카 이모(한국명 권경애)가 우리 가족을 받아줘서 약 4개월간 그의 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서 “본인(모니카 이모)이 천주교 신자임에도 하루 다섯 번 기도를 해야 하는 이슬람 문화를 존중해 줬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직장을 구한 뒤엔 현재의 집으로 이사하게 돼 예전만큼 자주 볼 수 없지만, 그는 여전히 권씨를 ‘이모’라고 부르며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는 집안 곳곳에 놓인 아이 장난감과 가구 등을 가리키면서 “전부 모니카 이모가 준 것”이라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오마르씨와 나집씨도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쉼터에서 다른 예멘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제주나오미센터의 경우, 한 채당 보증금 100만원을 지불하고 재개발 아파트 15채를 임대했다. 각각의 아파트에는 예멘인 4, 5명이 그룹을 이뤄 월세 30만원을 내며 살고 있다. 가장 큰 고민인 거주의 문제를 해결해 준 셈이다.
이처럼 지역사회의 도움에다 본인들의 의지도 더해져 기본적인 의식주는 어느 정도 해결한 상태지만, 그럼에도 예멘인들의 생활엔 여전히 제약이 많다. 난민 지위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3년부터 시행된 난민법에 따르면, ‘난민 인정자’는 교육ㆍ사회보장ㆍ구직 등에서 내국인과 똑같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대다수 예멘인들의 신분인 ‘인도적 체류 허가자’는 그렇지 않다. 교육과 복지 혜택은 주어지지 않고, 체류기간(1년마다 갱신)에 한해서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예멘인들이 1년 미만의 계약직으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취업 허가를 위해 관리 당국에 지불해야 하는 12만원, 체류기간 연장을 위해 내야 하는 6만원도 은근한 부담이다.
모하메드씨는 “근로소득세를 내는 예멘인들에겐 최소한 보육 혜택만은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아들의 어린이집을 알아보던 중 겪은 어려움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월 180만원을 버는 사람이 생활비 외에 (매달 40만원 이상인) 어린이집 보육료도 감당하긴 힘들더라고요. 저도 세금을 내고 있으니 보육료 지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인도적 체류 허가자들은 안 된다고 하더군요.” 현재 그는 민간단체에서 절반가량의 비용을 지원받아서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다.
인도적 체류 허가자는 4대 보험의 혜택도 절반만 받을 수 있다.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가입만 가능하다. 오마르씨 사례처럼 부당해고 위험에 자주 노출되는 이주민들이 역설적으로 고용보험 혜택 대상에선 제외되고 있는 것이다. 또 무직 예멘인들에게 지역가입 건강보험료는 적지 않은 금액인 탓에 지병이 있는 경우 실직은 치명적이다. 당뇨병이 있는 오마르씨는 “건강보험 지역가입은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낸다”며 “(해고 전 병원에서 받아둔) 한 달치 인슐린이 남아 있는데, 당장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다음달부터 약을 못 살 것 같다”고 불안감을 드러냈다.
한국에 대한 아쉬움은 결국 “난민으로 인정받기 너무 어렵다”는 것으로 수렴됐다. 예멘 내전 발발 이듬해인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한국에서 난민 심사를 받은 예멘인은 총 909명이었는데, 이 중 30명만이 난민으로 인정됐다. 시기와 국적의 범위를 넓혀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가 집계를 시작한 1994년부터 올해 4월까지 전체 난민 신청자 6만8,761명 가운데 난민 지위를 얻은 이들은 1,052명(1.5%)에 그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24.8%)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치다. 그만큼 한국은 난민으로 인정받기가 까다로운 나라다.
실제로 제주에서 만난 예멘인들은 난민 지위와 관련한 대화를 나눌 때면 ‘절박함’을 숨기지 않았다. 인도적 체류허가자들은 한국정부의 판단에 따라 언제든지 출국명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헤드씨는 “후티반군의 징집을 거부했기 때문에 지금 예멘으로 돌아가면 죽을 수도 있다”며 “전쟁을 피해 이주해 온 대다수 예멘인들이 왜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법무부는 이에 대해 “난민법상 난민 지위를 획득하려면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받을 수 있다’고 인정돼야 하는데, (예멘인들의 이주 사유인) 전쟁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후티반군의 징집 명령을 받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사실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고 밝혔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주장은 다르다. 난민인권네트워크 의장을 맡고 있는 이일 변호사(공익법센터 어필)는 “제주에 들어온 예멘인 대다수는 후티반군으로부터 피신한 게 명확하다. ‘정치적 견해에 의한 박해’로 봐야 한다”고 반박했다.
물론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은 심사통보를 받은 날부터 30일 이내에 이의신청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예멘인들은 이 절차로 결과가 바뀌는 사례를 거의 보지 못했다며 이의신청을 포기했다. 심지어 통역이 제대로 되지 않아 해당 절차를 인지도 못한 채 신청 기간을 흘려 보낸 이들도 많다.
중동 지역의 정세 변화는 아무리 미묘한 것이어도 예멘인들 사이에선 큰 파장을 낳는다. 예를 들어 예멘 정부군을 지원하던 사우디아라비아가 최근 후티반군에 휴전을 요청한 것과 관련, 예멘인들은 혹시라도 후티반군이 이를 수용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럴 경우 기존 예멘 정부는 유명무실해지고 후티반군이 예멘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데, 국제적으로는 ‘내전종식’으로 인식돼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목소리에 힘이 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휴전이 된다 해도 예멘에는 후티반군이 곳곳에 상주하고 있어요. 징집을 피해 탈출한 예멘인들의 목숨은 여전히 위험해요. 기존 예멘 정부가 제자리를 찾으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때까지는 ‘평화의 섬’ 제주에 머물고 싶습니다.” 아헤드씨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