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오고 물고기도 익었으며 순무도 맛이 딱 들었다(酒至鮮煖菁合味).
정결한 다섯 가지 과일을 꼭꼭 씹어 먹으면(五果嚼精)
백발이 머리로 올라오지 않을 것이라네(白髮不上頭來).
이 글은 춘곡 고희동과 면소 이도영이 함께 그린 부채 거죽(扇面) 형태의 ‘기명절지’에 스승인 심전 안중식이 남긴 발문(跋文)이다. 기명절지는 귀한 여러 옛 그릇과 꺾은 화초의 가지 등을 그린 그림으로 과일이나 채소 등이 함께 곁들여 그려지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화풍으로 보아 수박 등이 표현된 화면 좌측은 고희동이, 순무 등이 표현된 화면 우측은 이도영이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을 받은 사람의 이름은 지워져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안중식은 그 사람의 요구에 따라 화면에 표현된 물고기, 순무 등을 활용해 글을 적었다고 하였다.
고희동의 그림과 이도영의 그림 사이에 고희동이 쓴 글이 남겨져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이 작품은 을묘년(1915년) 포월(蒲月ㆍ음력 5월)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려진 소재나 안중식의 발문 등을 통해서 볼 때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전반적인 분위기는 가을이다. ‘순무도 맛이 딱 들었다’는 표현 때문에 더욱 그러한데, 대개 순무가 익는 때는 9, 10월 무렵이다.
원산지가 유럽(혹은 중앙아시아)인 순무는 중국을 통해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순무가 언제 처음 들어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의 시문선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가포육영(家圃六詠)’이라는 시에 ‘순무로 담근 장아찌’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전부터 우리 나라에서 재배된 것 같다.
순무는 무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채소로 뿌리가 퉁퉁하며 둥글거나 길다. 만청(蔓菁)이라고도 부르는데, 중국 오대(五代)의 구광정이 지은 ‘겸명서(兼明書)’에 보면 “북쪽 땅에서 나는 것을 만청이라고 하고 강남에서 나는 것을 배추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는 차가운 성질의 순무가 따뜻한 지방에서 자라면 뿌리가 크지 않고 배추 뿌리와 비슷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제갈량이 병사들로 하여금 순무를 심어 양식으로 보급했다 하여 제갈채(諸葛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제민요술’과 ‘본초강목’에 따르면 순무를 심을 때는 무너진 담 터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땅은 많을 수 없으니, 건조한 땅에 모래를 가져다 두텁게 북돋아 이랑을 만들어 심는 경우가 많다. 습한 곳에 심으면 땅이 단단하여 순무가 시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배된 순무는 봄에는 싹을, 여름에는 잎을, 가을에는 줄기를, 겨울에는 뿌리를 먹을 수 있어 흉년을 이겨내는 구황작물로 적당하다. 세종 때인 1436년에는 어명으로 수령들에게 순무 재배를 적극 권장토록 했을 정도였다.
주로 순무는 그늘지고 바람이 시원한 곳에 매달아서 말리거나 소금에 절여 오래 먹을 수 있도록 하였는데, 조선의 왕비 중 이런 순무를 탕으로 즐긴 분이 있으니 바로 성종 비 정현왕후이다. 보통 우리에게 자순대비로 알려져 있는, 중종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경빈 박씨를 죽이라고 청을 올리는 신하들의 선두에 서서 중종을 압박하던 대비마마, 드라마 ‘대장금’에서 최상궁이 모시고 있던 대비마마가 바로 정현왕후이다.
정현왕후는 1473년(성종 4) 성종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와 숙의에 봉해졌고,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가 폐위되자 이듬해인 1480년(성종 11) 성종의 세 번째 왕비에 봉해졌다. 1488년(성종 19)에는 후일 중종이 되는 진성대군을 낳았으며, 1530년(중종 25) 8월(음력) 경복궁 동궁 정침에서 승하하였다.
역사의 기록에 정현왕후가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중종실록’에 따르면 정현왕후는 생전에 자신의 일생에 대해 언문으로 기록해두었다고 한다. 정현왕후가 승하한 이후 국상을 치르면서 죽은 사람의 성명, 생년월일, 무덤 소재지 등을 기록한 지문(誌文)을 짓는 과정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이 언급된다. 중종이 정현왕후가 남긴 언문을 보고 간략히 적어 예조에 내린 비망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현왕후는 아버지 윤호가 신창현감으로 있을 때인 임오년(1462년ㆍ세조 8) 6월 무자일에 고을 관아에서 출생하여 신창현의 창(昌)을 가지고 ‘창년(昌年)’이라 이름했다고 하며, 12세에 숙의로 뽑혀 궁에 들어와 정희왕후, 소혜왕후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성종이 승하했을 때 너무 애통해하여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가 소혜왕후가 돌봐주었다고 하며, 소혜왕후가 승하한 뒤 연산군이 삼년상의 기간이 길어 불편하다고 억지로 기간을 단축한 단상(短喪)으로 처리하자 이를 끝까지 애통해했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 ‘창년’의 유래라든지, 소혜왕후와의 관계, 상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는 점에서 중종이나 다른 사람들이 정현왕후를 칭송하기 위해 지은 글이 아니라 정현왕후가 생전에 남겨둔 일생에 대한 회고 중 일부분임이 분명하다.
어머니에 대한 중종의 효성도 지극해서 정현왕후의 상을 정희왕후의 상에 준해서 치르고자 했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즉위한 직후 수렴청정을 하였기 때문에 정희왕후의 상을 왕비이지만 왕에 준하여 치른 전례가 있었다. 이에 중종은 이 전례에 따라 정현왕후의 상도 정희왕후의 상과 격을 맞추고자 했다. 수렴청정을 하지 않은 정현왕후이지만 어머니를 위하는 아들 중종의 효성으로 수렴청정을 한 정희왕후처럼 상을 치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중종의 효성과 당시 사관의 기록으로 ‘중종실록’에는 특이한 기록이 하나 더 남아 있다. 정현왕후를 산릉에 장사 지내고 3년간 혼전에서 신주를 모시고 있던 1531년(중종 26) 8월 15일(음력), 추석제를 정현왕후의 혼전인 효경전에서 지내고 아침 상식을 올리기 위해 잠시 재실로 물러가 있던 중종이 풋잠에 들었을 때 꿈에 정현왕후가 나타나 ‘만청탕을 맛보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꿈에서 깬 중종이 놀라 내시부의 벼슬아치 설리(薛里)에게 물어보니 만청탕은 4월에서 8월까지는 쓰지 않는다고 하여 지금 만청탕을 올리는 시기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중종은 앞으로 사계절 모두 만청탕을 올리라고 지시하였다. 이 기사에 대해 당시 사관은 ‘만청은 정현왕후가 평시 즐기던 것으로 왕의 효성에 감응한 것이라고 하였다’라는 짧은 사평(史評)을 남겼는데, 이를 통해 정현왕후가 생전에 만청을 좋아했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15세기 말~16세기 초 조선왕실 인물을 떠올릴 때 폐비 윤씨나 연산군, 성종이나 인수대비(소혜왕후)를 떠올리는 경우는 많으나 정현왕후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화와 반정’의 혼란스러운 이 시기를 관통하며 조용하면서도 강단 있게 살아간 사람이 바로 정현왕후이다. 정현왕후는 어머니를 잃은 연산군을 자기 자식보다 더 어루만져 길렀고, 두 번의 사화가 일어났던 연산군대를 아들과 함께 무사히 버텨냈다. 또한 중종반정이 있어났을 때는 대비로서 결단을 내려 국가의 대업을 잇게 하였으며, 동궁(후일 인종)을 저주하는 작서의 변이 일어나자 직접 나서 언문 쪽지를 추관(推官)에게 보내 범인을 죄주는 정치적 행동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어려운 세월을 버텨내면서 아마도 정현왕후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정현왕후에게 제격인 식재료가 바로 만청이다. 만청에는 디아스타제라는 소화효소가 들어 있어 속을 통하게 해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며 기침을 다스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특히 가열해서 먹으면 단맛이 나기 때문에, 탕으로 먹는다면 맛도 좋고 먹기도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도하게 먹으면 가스가 차고 복통을 유발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