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폰처럼 감옥 갈 일 없어 안도했는데 10년간 못 끊을 줄은…”

입력
2020.06.2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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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합법 탈 쓰고 일상으로 침투  식욕억제제, 마약으로 남용되기도  최근 5년간 펜타닐 처방량도 2배 급증


편집자주

‘한국은 마약 청정국’이라는 믿음은 이제 옛말이 됐다. 지난달 말 대검찰청이 발간한 ‘2019년 마약류 범죄백서’를 보면, 지난해 마약류 사범은 총 1만6,044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 증가율도 무려 27.2%였다. 공식 개념은 아니지만 통상 ‘1년간 인구 10만명당 마약사범 20명 미만’인 국가를 마약 청정국으로 일컫는데, 한국의 작년 수치를 환산하면 ‘10만명당 30명꼴’이다. 마약으로부터 결코 안전하다고 볼 수 없다는 얘기다. 우리의 일상 속으로 마약이 깊숙이 침투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 주소를 4회에 걸쳐 짚어본다.



“제일 편한 게 ‘병원에서, 약국에서 주는 거니까 감옥에는 안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거였어요.”

인생의 절반 이상을 마약과 함께 보내고, 현재 단약((斷藥ㆍ약을 끊는 것)을 위해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영철(가명ㆍ45)씨. 지난 3일 경기 부천에서 만난 이씨는 인터뷰 내내 이러한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최근 10년간 중독됐던 식욕억제제 ‘디에타민’에 대한 얘기였다. 물론 그가 비만 치료제로 쓰이는 디에타민에 심취했던 이유는 다이어트 목적이 아니었다. 필로폰의 ‘대체재’였기 때문이다.


“필로폰 대신 식욕억제제… 효과도 비슷”

이씨는 거의 30년가량을 마약에 빠져 살았다. 시작은 중학교 3학년 때, 마약은 아니어도 환각 효과가 있는 본드 흡입이었다. 스무 살 무렵인 1994년부터는 일명 ‘땅콩’으로 불리는 감기약ㆍ신경안정제 등을 과다 복용했고, 97년엔 대마초에 손을 댔다. 곧이어 필로폰으로 넘어갔다. 전형적인 마약 중독자의 코스였다. 그는 “마약을 한다는 게 하나도 겁이 안 나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필로폰을 제공하던 ‘상선’이 수사기관에 잡혀 들어갔다. 공급 루트가 막히자 마약 성분(펜디메트라진)이 포함된 식욕억제제 ‘푸링’을 한번 접해 봤다. 그러나 필로폰에 워낙 중독된 탓인지, 약효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꺼번에 100알을 먹어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2010년쯤 ‘아는 동생’이 알려 준 디에타민은 달랐다. 향정신성의약품인 펜터민 성분이 들어간 디에타민은 푸링보다 훨씬 ‘센 약’이라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필로폰과 거의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원래 복용량은 하루 한 알인데, 10알 정도를 한꺼번에 먹으니 확 꽂히더라고요. 전화가 와도 못 받을 정도였어요.” 덕분에 필로폰 금단 현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안을 찾았다’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이씨도 과거 필로폰 투약 사실이 적발돼 몇 달간 징역살이를 했다.


“언제, 어디서나 처방전 쉽게 받아”

출소 이후, 그는 디에타민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씨는 “한번 걸리고 나니까 (필로폰은) 겁이 나더라”라면서 “디에타민은 구속될 위험이 없으니 심리적인 안도감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현행법상 개인 간 거래가 엄격히 금지되는 마약류라 해도, 의사 처방전만 받으면 ‘합법적으로’ 취득할 수 있는 약이었던 탓이다. 게다가 구하기도 쉬웠다. “병원 가서 말만 잘 하면 돼요. 저는 ‘살을 빼려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 받으면 폭식을 하니 식욕을 억제하려 하는데 푸링은 안 듣더라’라고 말하면 100% 다 처방해 줬어요.”

통상 1회에 한 달 분량인 30알을 받을 수 있는데, 며칠 만에 소진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종전 처방기록을 확인하지 않는 병원이 부지기수였고, ‘잃어버렸다’고 둘러댄다거나 동생의 이름ㆍ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해 중복 처방을 받기도 했다. 이씨는 “알코올 중독이 무서운 건 술을 어디에서든 쉽게 살 수 있기 때문인데, 디에타민도 마찬가지”라며 “마음만 먹으면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구할 수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단약에 들어간 지 어언 8개월째. 가족을 생각하며, 도움을 주는 의료진을 의지하며 버티고 있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직도 생각이 난다. “10년 전 디에타민에 손을 댄 이후, 그걸 끊은 건 지금이 처음이에요. 이토록 오래 저를 붙잡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여태껏 제가 했던 마약 중에서 그것만큼 단약에 고생하는 건 없습니다.”



가짜 처방전도 유통… ‘의료용 마약’ 점점 퍼져

의료용 마약류는 이처럼 ‘합법’이라는 외양을 취할 수 있어 경계심이 덜하다 보니, 처방전을 빼돌리거나 위조하는 사건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2년 전 경찰에 적발된 ‘서울대병원 간호사 펜타닐(마약성 진통제) 절취ㆍ투약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가 2017년 2월~2018년 2월 환자 명의로 펜타닐을 124회나 대리 처방받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펜타닐 투약 횟수는 무려 358회였다. 그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았다.

가짜 처방전이 시중에 유통되기도 한다. 2012년 7월 간호조무사 출신 A씨는 과거 같은 병원 근무 인연이 있는 B씨에게 부탁, 의약품명과 환자 이름이 위조된 식욕억제제 '푸링' 처방전 14장을 받아냈다. 이를 통해 1년 반 동안 푸링 1,170정을 불법 구입했고, 이 가운데 대부분(1,078정)을 복용했다. 법원은 A씨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B씨에겐 벌금 500만원을 각각 선고했다.

의료용 마약류의 처방 건수도 갈수록 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실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요구해 받은 자료에 따르면, 펜타닐 처방 건수는 △2015년 99만1,000건 △2016년 111만1,000건 △2017년 116만7,000건 △2018년 131만9,000건 △2019년 146만6,000건 등으로 계속 치솟았다. 같은 기간 처방 인원 수는 ‘73만4,000명→82만1,000명→86만8,000명→98만7,000명→112만4,000명’으로, 처방량도 ‘545만정→712만9,000정→791만1,000정→931만7,000정→1,006만9,000정’으로 훌쩍 뛰었다. 처방 인원의 급증은 그 이면에 가짜 환자도 상당수 섞여 있기 때문이라는 게 마약 전문가들의 추정이다.

지난해 10월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018년 7월~2019년 6월 의료용 마약류를 처방받은 환자는 총 1,784만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국민 3명 중 1명이 의료용 마약류를 접한 셈이다. 물론 대부분은 ‘진짜 환자들’이었겠지만, 마약에의 노출 위험이 우리 사회에서 점점 커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징후인 셈이다.


“마약성 진통제 오ㆍ남용 급증… 불법 인식 없어 심각”

“예전에는 환자들 중 대다수가 필로폰이나 대마초 중독자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선 처방 의약품 오ㆍ남용 환자가 급증하고 있어요.”



한국사회에서의 마약류 확산 실태에 대해 천영훈 인천참사랑병원 원장은 한국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같이 말하며 우려를 표했다.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위험한 징후가 느껴진다는 말이었다. 2003년부터 중독치료 전문 병원인 참사랑병원에서 근무하며 20년 가까이 마약 중독자들을 접해 온 천 원장으로부터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마약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들어봤다.

현재 가장 시급한 대책을 요하는 건 마약 성분 의약품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다는 점이다. 천 원장은 “2000년대 중반부터 미국 제약회사들이 ‘옥시코돈, 펜타닐 등의 마약성 진통제는 중독이 안 된다’는 논리를 펴며 판매를 시작했고, 때마침 (같은 아편계 마약인) 헤로인 중독자 단속이 강화되면서 풍선 효과로 마약성 진통제 시장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이런 흐름 속에 국내에서도 2, 3년 전부터 해당 약품 오ㆍ남용 환자들이 늘기 시작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게다가 ‘의사 처방’을 통해 악용되는 약물은 더 있다. 각종 다이어트 약품, 성인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치료제 등도 마찬가지로 ‘합법의 탈’을 쓰고 유통되고 있다. 천 원장은 “(이런 약물들은) 처방 자체에 불법성이 없다 보니 더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다”고 말했다. 실제로 처방 의약품 오ㆍ남용은 전통적인 마약에 비해 수사 당국의 단속 의지가 적고, 적발 가능성도 낮은 게 현실이다.

“마약 중독은 뇌질환… 치료 프로세스 필요”

천 원장은 “마약류 중독은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약물 중독은 ‘뇌 질환’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약은 뇌에 있는 보상계, 즉 쾌락 중추를 자극해서 엄청난 양의 엔도르핀과 도파민을 내뿜게 한다”며 “한번 마약을 맛본 사람은 그 외엔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고 느끼게 되고, 따라서 의지만으로는 끊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천 원장은 마약 중독과 치료 과정을 맹장염에 비유하기도 했다. “맹장염에 걸렸는데 혈서를 쓴 뒤 참는다고 낫는 건 아니잖아요. 병원에 가서 혈액 검사를 받고, 엑스레이를 찍은 뒤 수술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마약중독 치료도 적절한 프로세스가 있어야 합니다.”

결국 마약 중독 극복을 위해선 스스로 중독자임을 받아들이는 게 급선무라고 천 원장은 강조했다. 그는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본인이 마약 앞에선 완벽히 무력한 중독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단약이 유일무이한 해결책이란 걸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주변에 있는 다른 마약 중독자들과 관계를 완전히 끊고, 전문가 상담과 자조모임 참석에도 적극 응해야 한다”며 “상황에 따라선 약물 치료, 심리사회적 치료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물론 근본적인 해결책은 마약 복용 이후의 대책보다는 ‘예방’에 있다. 천 원장은 “사회적으로도 ‘마약은 나쁜 것이니 절대 해선 안 된다’는 식의 단순 구호보다는 금연 교육처럼 어떤 약물이 어떻게 몸과 정신을 망치는지 어린 시절부터 철저히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정우 기자
박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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