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국=민감국가' 지정 파장... 美 '불신과 우려'는 언제 싹텄나
지난 한 주 내내 한국 외교가는 파장이 지속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지난 14일 자국의 ‘민감국가 및 기타 지정국가 목록(Sensitive and Other Designated Countreis List·SCL)’에 한국도 포함돼 있다고 확인한 탓이다. SCL 지정의 의미는 가볍지 않다. 해당 국가의 연구자들이 미국 에너지부(DOE) 소속 연구소의 시설이나 프로그램, 정보에 접근하려면 특별 승인을 받아야만 한다. 미국과 원자력·인공지능(AI)등 첨단 기술 관련 협력을 하는 데 있어 상당한 제약이 불가피해진다는 얘기다. 2017년 공개된 SCL 목록에는 △아시아 10개국 △ 중동·아프리카 7개국 △유럽 7개국 △중남미 1개국이 올라 있다. 여기에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말기인 올해 1월 한국이 최하위 등급인 ‘기타 지정 국가’에 추가됐고, 다음 달 15일 발효를 앞두고 있다. 한미 정부가 21일 이 문제와 관련, “절차에 따라 조속히 해결하도록 노력한다”는 데 합의했지만 안심은 이르다. ‘민감국가 지정 해제’ 절차에는 일정한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시행 전 해제가 가능할지부터 불투명하다. 한국은 이미 SCL에 지정된 25개국과 비교할 때, 미국과 상호방위조약(1953년)을 맺은 유일한 국가다. 중국과 러시아는 ‘위험 국가’로, 북한 등 6개국은 ‘테러 지원 국가’로 각각 지정돼 있다.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 등 3개국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은 핵무기 보유국이다. ‘미국의 군사동맹’인 데다 핵무기도 없는 한국을 이들 나라와 한데 묶은 건 이례적인 수준을 넘어, 예사롭지 않은 조치라고 볼 수밖에 없다. 관심의 초점은 한국이 SCL에 오르게 된 정확한 배경이다. 한미 정부가 밝힌 ‘보안 문제 발생’도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렇다 보니 한국이 과거 핵무기 개발과 관련, 미국의 불신을 산 사례가 재조명을 받고 있다. 1970년대 초부터 2000년까지 한국의 핵 개발을 둘러싼 논란을 짚어봤다. 미국 DOE가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첫 지정 시기는 1981년, 해제 시점은 1994년으로 추정된다. 한국을 바라보는 미국의 ‘불안한 시선’이 10년 이상 이어진 것이다. 1993년 12월 당시 한국 외무부 회의에서 과학기술처는 “DOE는 1981년부터 내부 규정을 시행 중이며, 우리나라는 1981년 1월 5일 최초 시행 때부터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내용은 이후 외무부와 과기처, 상공자원부 주도로 열린 ‘제1차 한미 과기공동위원회 관계부처 대책회의’ 문건에서 드러났다. 한국이 미국 DOE의 SCL 목록에 포함되자 대응 논리를 마련하기 위해 마련된 회의였다. 당시 정부는 “핵무기 개발과 관련해 1970년대 우리 핵 정책에 대한 (미국의) 불신과 우려가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미국 회계감사원(GAO)의 1988년 보고서에 따르면, 1986년 1월~1987년 9월 DOE 로스앨러모스 등 핵무기 관련 연구소 방문객 통계에도 한국은 SCL 중 한 국가로 올라와 있다. 1996년 GAO 보고서의 1993년 1월~1996년 6월 통계도 마찬가지다. 이 보고서는 각주에서 “1994년 7월 28일부로 다음 국가는 더 이상 민감국가로 간주되지 않는다”며 한국 등을 열거했다. 미국의 ‘불신과 우려’는 1970년대 초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추진한 핵 개발에서 비롯됐다. 그 시절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 총책임자였던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는 과거 한국 언론 인터뷰에서 박 전 대통령의 핵 개발 착수 시점이 1972년쯤이었다고 회고했다.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는 모습을 본 박 전 대통령은 ‘북한의 위협과 관련해 한미 동맹만 믿고 있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는 게 그레그 전 대사의 전언이다. 1971년 미국의 주한미군 7사단 철수도 ‘1968년 북한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침투 사건’(김신조 사건)을 겪은 박 전 대통령에게 자체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느끼게 만든 계기로 꼽힌다. 1974년 한국은 5대 핵 보유국 중 하나인 프랑스와 원자력 협력 협정을 체결하며 본격적인 핵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은 집요했다. 그레그 전 대사는 “미국이 1973년 그 사실을 알게 됐고, 미 정부는 매우 조심스럽게 이를 멈추라고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고 밝혔다. 1975년 미국은 “만약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계속한다면 한미 안보 동맹은 끝장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75년 4월 한국은 핵확산방지조약(NPT)을 비준한 뒤, 이듬해 1월 프랑스와의 핵연료 재처리 시설 도입 계약을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해 12월, 핵무기 프로그램은 중지됐다. 하지만 얼마 안 돼 한국의 핵무기 프로그램이 재개됐다는 분석도 있다. 1977년 1월 막 취임한 지키 카터 미국 대통령이 “향후 4, 5년 내에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겠다”고 선언한 게 계기였다고 한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와 피터 헤이즈 미국 노틸러스 연구소 소장이 2011년 쓴 글에 따르면 미 중앙정보국(CIA)의 1978년 보고서에는 “한국의 자주국방은 결국 핵무기 개발로 가능할 것이라고 (한국 정책 기획자들이) 여기고 있다”고 기재돼 있다. 보고서에는 “미국의 핵우산에 대한 한국의 신뢰가 약해지면서, 특히 한국 정부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핵무기 옵션을 추구하길 원하는 사람들의 힘이 강화될 것”이라는 관측도 담겨 있다. CIA는 보고서에서 “1977년 한국이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중심으로 미사일 사거리를 늘리는 연구를 하고 있다”며 핵무기 개발과 연관됐을 것으로 추측했다. 문 교수와 헤이즈 소장은 미국 하원의원 앤서니 베일렌슨이 당시 사이런스 밴스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한 내용을 제시하며 “CIA 보고서 발간 후인 1979년에도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도용하기 위해 미국 기업으로부터 설계도와 설명서 등을 확보한 것으로도 알려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터졌다.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 암살, 뒤이은 12·12 군사 쿠데타 및 전두환 군사정권 출범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폐기했고, 이로써 한국의 핵 개발 움직임도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그레그 전 대사는 당초 한국이 1976년 핵무기 개발을 포기했었음에도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 발언을 한 이유에 대해 “박정희는 독재자였기에, 이는 (인권을 중시하는) 카터와는 잘 맞지 않았다. 또 카터는 박정희가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한국의 핵무기 프로그램은 이렇게 폐기됐다. 하지만 두 차례의 핵 관련 실험이 적발돼 2004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대대적 사찰을 받기도 했다. 제5공화국 초기였던 1982년, 서울 노원구의 한국원자력연구소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마트 Ⅲ’에서 0.7g의 플루토늄이 추출됐다. 문제는 당시 추출 실험을 IAEA에 자진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62년 가동을 시작한 이 원자로는 IAEA 핵안전조치협정의 신고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 추출 실험은 신고되지 않았고, 1997년 IAEA가 원자로 환경샘플링으로 추출 흔적을 발견해 냈다. 이를 몰랐던 정부는 IAEA에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 2003년 다시 확인 요청을 받고 나서야 실험 사실을 보고했다. 20년이 지나서야 정부가 자국 내 플루토늄 추출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2000년에도 한국의 IAEA 미신고 사실이 드러났다. 대전 원자력연구소에서 최소 3회의 극비 레이저농축실험을 실시해 0.2g의 농축 우라늄을 제조해 놓고, IAEA에 신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IAEA는 세 차례의 사찰을 거쳐 “한국의 핵무기 개발 여부를 둘러싼 모든 의혹이 해소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1982년 실험에서 추출된 플루토늄의 양이 “많아야 86㎎에 불과하다”는 장인순 당시 원자력연구소장의 주장과 달리, IAEA 보고서에서는 플루토늄 양이 0.7g으로 드러났다고 기재됐다. 해당 실험 재료가 천연우라늄이 아니라 감손우라늄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장 소장이 계산 착오를 일으킨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