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산업 게임체인저로 주목받는 양자기술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미국, 중국, 유럽보다 뒤처졌다는 건 속상하지만 인정한다. 그래도 독자 양자기술을 확보하려고 고군분투하는 과학자들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얻는다. 지난 12일 있었던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의 양자컴퓨터 시연을 기다린 이유는 이 때문이다.
20큐비트라 외국보다 성능이 떨어지긴 하지만, 국산 양자기술이 꾸준히 업그레이드되는 모습을 독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한국일보는 시연 일정을 수시로 문의하며 취재를 이어왔다. 이번엔 외부와 연결하는 네트워크도 구축해 다른 연구자들에게 양자컴퓨팅 환경을 공유할 수 있게 된 만큼 국내 연구 현장에 미치는 영향 측면에서도 시연의 의미가 적지 않았다. 표준연은 해당 기술을 기자들에게 설명하는 백브리핑 자리도 마련하기로 했다.
그런데 시연 이틀 전 백브리핑이 돌연 취소됐다. 그 배경엔 같은 날 출범이 예고된 양자전략위원회가 있었다. 양자기술 시연보다 양자전략위 출범이 더 돋보여야 한다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표준연에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기술보다 위원회를 더 신경 쓰라는 일종의 ‘홍보 가이드라인’을 준 거나 다름없다. 현장 취재도 과기정통부 대신 기획재정부 출입기자 일부에게만 허용됐다. 양자전략위 위원장이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라서다.
당일 행사에선 정부 의도대로 연구진보다 최 대행이 돋보였다. 그 많은 역할 와중에 직접 현장을 찾고 양자기술 거버넌스를 확립한 건 고무적이다. 하지만 연구비가 삭감되며 홀대받는 상황에서도 양자기술을 끌어올리려고 부단히 애썼을 과학자들의 노고는 뒤로 밀렸다. 돋보이겠다던 양자전략위가 들고나온 ‘전략’은 1년 전 정부가 이미 발표한 퀀텀 이니셔티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누구를 위한 행사이고 위원회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첨단기술을 대하는 정부의 고루한 방식은 바이오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올 1월 ‘민관 원팀으로 역량을 총결집해 드넓은 가능성의 신대륙’을 열겠다며 범부처 거버넌스를 표방한 국가바이오위원회가 닻을 올렸다. 불과 1년여 전인 2023년 12월 범정부 거버넌스이자 민간 합동 컨트롤타워라 자임하며 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가 가동됐는데 말이다.
두 위원회의 위원장은 최 대행, 한덕수 국무총리가 각각 맡았지만, 핵심 인재 11만 명 양성, 의사과학자 육성, 연구개발 혁신, 규제 발굴과 개선, 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등 하겠다는 일들이 상당 부분 겹친다. 국가바이오위는 1,000만 건, 바이오헬스혁신위는 100만 명의 빅데이터를 구축하겠다는데 같은 건지 다른 건지 모호하다. 국가바이오위가 만들겠다는 생성형AI 의료기기 허가·심사 가이드라인은 출범 다음 날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발간했다. 바이오 전용 GPU를 3,000장 이상 확보하겠다는데, 공급이 달리는 시장 상황을 감안하면 연내 GPU 1만 장 확보를 내세운 국가AI위원회와 구매 경쟁을 해야 할 판이다.
숫자와 수사가 가득한 위원회 자료에 이름을 올린 민간위원들은 50~60대 교수나 유명 기업 수장이 대다수다. 심지어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도 바이오특별위원회가 있는데, 세 위원회의 민간위원을 합치면 50명에 이른다. 혁신 없이도 먹고살 수 있는 기득권층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굳이 옥상옥으로 둬야 하는지 의문이다. 양자기술과 첨단바이오를 키울 주인공은 현장의 젊은 과학자와 엔지니어다. 이들을 돋보이게 해도 모자랄 시기에, 여전히 고위 관료 중심의 ‘보여주기’와 옥상옥 거버넌스가 반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