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출 때 무대와 관객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만 있으면 충분하죠. 춤은 신체라는 감옥에서 나를 꺼내주고 자유롭게 해 주는 도구니까요."
18년 만에 한국을 찾은 이스라엘 태생의 혁신적 안무가 오하드 나하린(73)이 말하는 춤의 이점이다. 나하린은 12일 세종문화회관 오픈스테이지에서 열린 서울시발레단 시즌 개막작 '데카당스'(14~23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기자간담회에 안무가 자격으로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나하린은 모국 이스라엘의 바체바 무용단 예술감독(1990~2018년)으로 활약하며, 춤이 단순한 기교가 아닌 신체를 통해 경험하는 철학적 과정임을 증명해 왔다. 그는 "'데카당스' 공연이 모두가 춤을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춤을 추도록 초대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도 했다.
'데카당스'는 나하린의 대표작을 엮어 하나의 공연으로 재구성한 작품. '데카당스'는 10을 의미하는 '데카'(Deca)와 춤을 뜻하는 '댄스'(Dance)의 합성어다. 나하린의 바체바 무용단 예술감독 취임 10주년을 기념해 2000년 초연됐다. 이후 다양하게 변주된 '데카당스'라는 제목의 공연이 세계 유수의 무용단에서 공연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2002년 바체바 무용단의 내한 공연으로 '데카당스'가 소개된 바 있다.
이번 서울시발레단 버전의 '데카당스'는 '마이너스 16', '아나파자', '베네수엘라' 등 1993년부터 2023년까지 발표된 그의 안무작 8편을 한 편으로 엮었다. 이스라엘 전통 음악부터 차차·맘보에 이르는 다채로운 음악, 감각적 시각 연출, 에너지 넘치는 움직임이 특징이다. 나하린은 "2000년 초연 때 계속 공연할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나 여러 작품을 재구성하면서 내가 발견한 것을 무용수들과 나누는 과정이 좋았다"고 말했다.
"춤이 곧 언어"인 나하린에게 '데카당스'는 사람들이 춤을 추는 것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일종의 '놀이터'다. 그는 "풍부한 감성을 가진 무용수에게서 그만의 보석을 찾아내는 과정이 춤의 미학"이라며 "무용수의 감정을 열어주는 열쇠만 쥐어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나하린의 안무는 그가 개발한 독창적 움직임 언어 '가가'(Gaga)를 기반으로 한다. 테크닉보다 무용수만의 내재적 감각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강조한 것으로, 아기 옹알이처럼 단순한 '가가'라는 말로 표현했다. 나하린은 "움직임 자체보다 움직임이 어떤 질적 수준을 갖출 때 관객의 마음에 가닿는지를 연구한다"고 설명했다. 무용수들이 거울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춤을 조율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연습실에 거울을 두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나하린은 "세상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며 춤을 추는 것은 무용수의 영혼을 망치는 일"이라며 "역동성과 질감을 살린 정확한 춤을 추고 싶다면 움직임을 보고 교정하는 게 아니라 감각의 범위를 통해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클래식 발레 교육을 받은 서울시발레단 무용수들에게 이번 공연은 감각적이고 즉흥적 요소를 결합한 새로운 춤의 형태를 탐색하는 기회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뮤지컬 장르가 라이선스 공연을 활발히 하다 창작 뮤지컬로 옮겨갔듯, 서울시발레단을 통해 외국의 좋은 작품이 소개되면서 컨템퍼러리 발레에도 새로운 전기가 만들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