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게 '개인' 하늘은 없다

입력
2025.03.12 18:30
27면

편집자주

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봄비는 촉촉이 내려야 한다. 소리 없이 보슬보슬 내려야 이쁘다.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변영로) “꽃 필 만큼 적시고 땅은 질척거리지 않는”(김매순) 봄비라야 반갑다. 농부에게 봄비는 ‘일비’다. 오늘 내린 비에 농부의 마음이 바쁠 게다. 기지개 켠 논두렁을 부지런히 오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경운기 시동을 걸어보고, 쟁기 가래 써레 호미도 매만졌을 것이다.

술꾼에게 봄비는 ‘술비’다. “봄비는 일비, 여름비는 잠비, 가을비는 떡비, 겨울비는 술비”라는 옛말이 통할 리 없다. 철을 가리지 않고 비만 오면 설레는 이가 술꾼이다. 술맛을 돋워줄 노래도 푸지다. 신중현의 ‘빗속의 여인’, 이은하의 ‘봄비’, 채은옥의 ‘빗물’, 배따라기의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그러고 보니 봄비는 첫사랑을 닮았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조심조심 다가온다.

안개비, 이슬비, 가랑비가 봄비로 제격이다. 모두 가늘게 조금씩 내리는 비다. 빗방울이 안개비보다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는개도 봄과 잘 어울린다. ‘늘어진 안개’ 는개는 토박이말이다. 겨우 먼지가 날리지 않을 정도로 조금 내리는 ‘먼지잼’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비다. 고운 이름답게 적당히 내려 우산 없이도 빗길을 걸을 수 있다.

얌전하고 순한 봄비라도 나흘간 이어지면 지겹다. 사흘이면 충분하다. 나흘째가 되면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이 그립다. 활짝 갠 말간 하늘이 마음속에 그려진다. “활짝 개인 하늘”이라고 고쳐 말하고 싶은 이가 있겠다. ‘개다.’ 흐리거나 궂은 날씨가 맑아진다는 뜻의 동사다. 날씨가 맑아지는 건 자연현상이다. ‘개다’에 피동 접사 ‘이’를 붙일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머릿속에서 ‘개이다’라는 말은 버려도 된다. 비가 개고, 눈이 개고, 날이 갠다. 좋은 사람한테 위로받으면 마음도 개고 기분도 갠다. 옷이나 이불을 단정하게 포갤 때도 ‘개다’면 충분하다.

봄비가 내린 후 세상이 꽃으로, 초록으로 물들었다. 시인 고정희(1948~1991)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봄비를 칭찬했다. 이쁘다고.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세상, 봄비처럼 순하고 이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이쁘다'가 표준말에 오른 게 새삼 고맙다.



노경아 교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