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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5.03.06 16:55

"휴전이요? 애초에 기대도 안 했어요." 15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독립광장에서 만난 드미트로는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지난 11일 합의한 뒤 러시아에 수용하라고 압박 중인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30일 중단'에 대한 생각을 묻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휴전에 동의한다'면서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중단 등 이런저런 조건을 붙여 수용하지 않는 현 상황을 일찌감치 예상했다는 게 그의 말이다. "휴전안을 선뜻 받을 생각이었다면 지금까지 전쟁을 이어오지 않았겠죠. 그가 휴전 합의를 휴지 조각으로 만든 건 또 하루이틀입니까." 미국·우크라이나의 '30일 휴전안' 마련으로 2022년 2월 개전 이래 휴전 가능성이 가장 높아진 상황에서 한국일보는 우크라이나 시민의 목소리를 듣고자 키이우를 찾았다. 휴전 논의에서 가장 크게 들려야 하는 것은 침략국 지도자인 푸틴 대통령이나 힘의 논리로 협상판을 쥐락펴락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목소리가 아닌 전쟁으로 인해 삶이 파괴된 평범한 우크라이나 시민의 목소리여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날 만난 20여 명의 시민들은 푸틴 대통령이 휴전에 시큰둥한 데 대해 그다지 실망하지 않고 있었다. 드미트로 말처럼 러시아에 대한 불신이 워낙 컸던 탓이다. 더구나 전장에서 맹위를 떨치는 러시아에 굳이 전쟁을 멈출 유인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인지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특히 지난해 8월 우크라이나가 일부 점령한 러시아 서부 쿠르스크주(州)에서 '완전 탈환'을 목전에 두고 있다. "푸틴에겐 휴전안을 받을 이유가 딱히 없으니 우크라이나가 수용할 수 없는 조건들을 내거는 여유를 부리는 거겠죠." 키이우에서 만난 볼로디미르는 냉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휴전이 합의될 가능성은 물론, 이후 이행에 대해서 비관하는 건 미국 때문이기도 했다. 대학생 율리야(20)는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평화는 안중에도 없어요. 자국 이익 또는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이 주도하는 협상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요." 다만 "휴전은 종전으로 향하는 디딤돌이 될 것"(비탈리·25)이라고 기대하는 이도 소수지만 있었다.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휴전'이 이뤄질 것이라는 데 대한 기대가 크지 않다고 해서 휴전을 바라지 않는다는 건 결코 아니었다. '전쟁을 멈춘다'는 것은 곧 '살상을 멈춘다'는 뜻이기에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사실 누구보다 휴전을 열망했다. 올레나(33)는 군인인 아버지가 쿠르스크 작전에 관여하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말했다. "러시아와의 합의는 그게 어떤 것이든 믿지 않아요. 그러나 아버지를 생각하면 어떤 합의든 이뤄지길 바라게 됩니다." 그는 대화가 끝날 무렵 울고 있었다. 전황이 열세인 데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거둬가는 중이지만, 우크라이나 시민 상당수는 여전히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품고 있었다. 독립광장에 빼곡하게 꽂힌 전사자 사진을 바라보던 옥사나는 "우크라이나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싸울 것이기에 승자는 결국 우크라이나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론조사기관 입소스가 지난 5~10일 진행한 여론조사에서도 '우크라이나가 이길 것'이라고 답한 사람은 59%로, '그렇지 않다'(21%)는 응답을 크게 상회했다. 그러나 '무엇이 승리인가'에 대한 정의는 서로 같지 않았다. 당장 영토 문제에서 그랬다. 직장인 카테리냐(35)는 "러시아가 2014년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까지 탈환하는 게 곧 승리"라며 "'온전한 영토' 없이 '온전한 우크라이나'는 없다"고 말했다. 반면 우크라이나 전사자 사진으로 빼곡한 키이우 추모의벽 앞에서 만난 데니스는 "모든 영토를 탈환하려면 엄청난 인명 피해가 수반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영토 일부를 포기하는 게 우리로선 승리일 수 있다"고 말했다. 2022년 3월 15일 전장에서 고인이 된 사촌 시타크 기일을 맞아 추모의벽에 왔다는 그는 "더 큰 희생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고도 반문했다. 개전 초만 해도 굳건했던 '우크라이나의 승리=평화'라는 공식도 흔들리고 있었다. 긴 전쟁으로 인해 고통과 피로감이 누적된 탓이다. 지난해 10월 러시아군과 싸우다 사망한 친구 유리의 사진을 독립광장에 꽂던 아나스타샤(18)는 말했다. "우리가 승리를 원하는 건 유리처럼 전쟁 중 스러진 많은 이들이 우크라이나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는 사실을 하늘에서 자랑스러워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유리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선 러시아와 끝까지 싸워야 할 것 같아요. 근데 그 과정에서 유리 같은 희생자가 더 많이 생기겠죠. 과연 그게 평화인지 잘 모르겠어요." 지난달 28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정상회담장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모욕했던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분노는 미국·우크라이나 합의안 마련에도 식지 않은 모습이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 면전에서 "여러분은 죽어가고 있다. 당신에게는 카드가 없다.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말했다. 추모의벽에서 만난 또 다른 데니스는 트럼프 대통령을 "추악하고 비(非)문명적"이라고 수식하며 그의 발언이 "나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모욕을 생생하게 지켜보며 내부는 결집한 듯했다. 우크라이나 시민 상당수는 '백악관 파행' 이후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마리야(33)는 "기죽지 않고 우리 군인과 국민을 대변하는 모습을 보며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는 싸워야 할 순간에 싸웠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사임 요구도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단호히 배격했다. 더 이상 '우크라이나 우방국'이 아님은 물론 우크라이나를 더 궁지로 모는 듯한 미국임에도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미국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안전 보장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 대가로 광물 개발권을 가져가겠다는 트럼프 행정부 구상에도 찬성했다. 볼로디미르는 "미국 자본이 우크라이나에 있다는 것 자체가 러시아에는 '우크라이나를 넘보면 안 된다'는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 논리이기도 하다. '못 믿을' 미국에 기댈 수밖에 없기에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약소국 시민으로서의 설움도 호소했다. 아나스타샤는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트럼프 대통령의 눈에 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고 슬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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