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마저 날아가 버릴라··· 개발의 바람 멈추어다오

입력
2025.03.08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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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알뜨르 비행장·송악산 일대 야구장·파크골프장·사격장 조성 계획
중요 경관자원·역사현장 훼손 우려

제주도 서귀포 남서쪽 가장자리에 ‘모슬포’라 불리는 지역이 있다. 지독히 바람이 많아 제주 안에서도 바람코지(곶)로 손꼽힌다. 바람 잘 날 없는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중죄인들의 유배지로,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의 전초기지로, 해방 이후에는 4·3 학살터로, 한국전쟁기에는 중공군 포로수용소로 호명됐다. ‘마을 곳곳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고통의 흔적이 밟힌다’라는 주민들의 표현이 과장스레 들리지 않는 배경이다. 모슬포 남측 해안가에는 100여 년 전 일본해군이 건설한 항공기지가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보존돼 있다. 제주 사람들은 이곳을 ‘알뜨르 비행장’이라 불러왔다. ‘알뜨르’는 ‘아래 벌판’이라는 의미의 제주 방언이다. 제주도가 지난해 말 역사 현장인 알뜨르 비행장 일대에 대규모 야구장과 파크골프장을 포함하는 스포츠타운을 조성한다는 구상을 밝힌 뒤, 이 모슬포 아래 벌판에서는 개발 바람이 일고 있다.


애초 ‘마라해양도립공원 공원계획 변경 용역’은 송악산 일대 자연과 경관 가치, 알뜨르 비행장 일원 역사 자원을 연계해 보전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제주도가 추진한 것이지만, 용역과정에서 기존 평화대공원 조성계획에 체육시설 조성안이 추가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용역 결과에 따르면 활주로 동편에는 전지훈련용 야구장 4면과 사격장이, 관제탑 인근에는 국제대회 유치가 가능한 대규모(36홀) 파크골프장이, 송악산 인근 산이수동 마을 방면에는 국민체육센터와 축구장이 들어선다. 오영훈 제주지사는 서귀포시 대정읍 제주평화대공원 일부를 체육시설로 활용하는 계획에 대해 "평화와 스포츠는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충분히 검토될 만하다"고 말하며 긍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알뜨르 비행장은 중일전쟁 초기에 일본군이 조성, 1937년 일본 해군항공대가 남경(난징) 폭격을 위한 발진기지로 이용했다. 비행장은 태평양전쟁과 함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인정받으며 큰 규모로 확장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땅을 빼앗기고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군은 알뜨르 기지를 접수하고 이후 한국군에 인계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알뜨르 비행장 활주로 양옆에 대규모 중공군 포로수용소가 설치됐다. 전쟁포로 약 1만5,000명이 1년 6개월가량 이 지역에 머문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알뜨르 비행장에는 활주로와 엄체호(격납고) 19기, 지하벙커, 관제탑 등의 시설물이 남아 있다.


일본 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터가 제공하는 과거 알뜨르 비행장 평면도를 살펴보면, 현재는 일부 흔적만 남은 상태이지만 알뜨르 지역엔 비행지휘소와 방탄지휘소, 연료고, 격납고, 장병 숙소, 창고 등 일렬로 늘어선 건물군이 있었고, 동측 섯알오름 일대에는 의무실과 금속공장, 목공장, 작업원 휴게소가 존재했다. 제주도가 야구장과 골프장 등 체육시설을 짓겠다고 계획한 지역의 상당 부분이 이들 주요 시설물 터와 중첩된다. 면밀히 연구되지 않은 역사유적과 중요 경관자원의 영구훼손이 우려되는 부분이다.


조성윤 제주대 명예교수는 “일본 본토를 다 뒤져도, 동아시아 어디를 가봐도 알뜨르만큼 일본군 전쟁 유적지가 잘 남아 있는 곳이 없다”라며 “그들의 만행과 전쟁의 참상을 증거하고 이를 통해 평화교육을 활성화하려면 역사 유적을 생생하게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복합적인 역사적 경험이 녹아 있는 알뜨르 비행장은 전쟁의 기억을 통해서 평화를 생각할 수 있는 기념 공원이 되어야 한다”면서 “과거 알뜨르 비행장의 옛 모습과 관련된 흔적을 발굴하고 이를 바탕으로 무엇을 어떻게 정비하고 재구성하고 재현할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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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원주민에겐 말을 타고 달리다 '멈칫' 말을 세우고 내려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하상윤의 멈칫]은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생략되거나 소외된 것들을 잠시 되돌아보는 멈춤의 시간입니다.
서귀포= 하상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