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가 된 도시와 암매장된 시신들. 고약하게 타는 냄새를 사람들은 ‘전쟁 냄새’라 했고 묘비에는 비석조차 세워지지 않았다. 3년 전 러시아군의 전격 침공 직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배후도시 부차는 ‘대량학살의 도시’로 이름 붙었다. 수백 명의 민간인 학살과 고문, 수천 명의 우크라 어린이 강제 납치· 이주 등 전쟁범죄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이 들끓었고, 국제형사재판소(ICC)도 전쟁 발발 1년 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러시아와 우크라군의 3년 공방에 양측이 수십만 사상자를 낸 마당이지만 잊혀선 안 될 러시아군의 만행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후 미국의 현란한 급변침에 세계는 멀미가 날 지경이다. 미국은 침략자나 침략이란 말을 지우고 대신 분쟁이라는 이름으로 러·우 전쟁을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트럼프는 평화 정착이라는 미명하에 편하게 전쟁을 종식시키려 한다. 전쟁 발발 원인도 우크라에 돌리고 여럿이 모인 협상은 번거로워한다. 강자끼리 물밑 합의를 보고 약자에겐 받아들이길 강권하는 식이다.
지난달 말 트럼프는 안전보장을 요구하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에겐 "당신에겐 카드가 없다"고 수모를 안겼다. 5일 뒤엔 평화 의지를 보일 때까지 군사지원을 끊겠다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젤렌스키는 하루 뒤 미국의 헌신에 감사를 표하면서 트럼프가 원하는 광물협정 서명을 약속하고, 공중과 해상의 휴전안을 내놓았다. 트럼프는 4일(현지시간)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하에 지속 가능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일할 준비가 돼 있다’는 젤렌스키 편지를 읽으며 여러 차례 “아름답지 않으냐”고 목전에 둔 종전 성과를 과시했다.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제재 해제도 그리 머지않았다.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엔 보상이 따르고, 벼랑 끝에 몰린 우크라엔 굴종을 강요하는 평화 방식을 21세기에 목격하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국제규범의 수호자였던 미국이 주도하게 될 줄 말이다. 실은 제국주의 시대에 우리도 많이 당해왔던 바다. 대한제국 시절 영토 사용을 허용토록 한 러일전쟁 직후의 한일의정서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조약,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과 행정권을 장악한 정미7조약, 그리고 주권을 몰수한 한일병합까지 일본은 “동양 평화”를 운운하며 굴종을 강요했던 터다.
그러니 남 일 같지 않은 우크라 처지다.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할 수 없다. 더욱이 전쟁 책임,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 종전과 평화는 더욱 그러하다. ‘정의롭지 못한 평화’는 필히 동티가 나기 십상이다. 약소국인 체코슬로바키아 동의 없이 땅을 내주고 히틀러의 비위를 맞췄던 뮌헨협정의 평화는 2차 세계대전을 촉발했다. 우크라에 안전보장 없는 종전 협정이 맺어진다면 러시아와 푸틴의 팽창 야욕만 부추길 게 뻔하다. 우크라는 물론이고 인접국인 발트 3국과 폴란드, 나아가 유럽 전역이 전전긍긍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기존 질서와 규범을 어지럽히는 트럼프의 파괴적 일방주의로 세계는 위험해졌다. 우리 역시 차례를 기다리는 처지다. 트럼프가 아시아와 북핵 등 한반도 안보 문제로 눈을 돌릴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불허다. 밑도 끝도 없이 "군사 도움을 받는 한국의 관세가 미국의 4배"라는 트럼프 발언은 서막에 불과하다. 적과 친구에 대한 구분이 없는 건 둘째 치고 논리도, 합리성도 없는 완력 행사에 맞설 강단을 보여야 한다. 트럼프식의 '아름다운' 평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 아무리 당장 국가리더십이 부재해도 우리 국력이 그렇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