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 주워 500만 원 기부' 탈북 할머니 "나라에 보답하고 싶었다"

입력
2025.03.04 18:00
24면
"나를 살게 해준 나라에 보답하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께 '사람은 원칙을 지키고 도움을 받으면 꼭 갚는 도리를 알아야 한다'고 배웠어. 많지는 않지만 꼭 기부하고 싶었어."

대전 대덕구 석봉동에 사는 기초생활수급자 김순자(78) 할머니는 지난달 26일 오전 석봉동행정복지센터를 찾아 노영주 석봉동장에게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5만 원권 100매가 담겨 있었다. 김 할머니는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고 노영주 동장에게 당부했다. 김 할머니가 알록달록한 보자기에 꽁꽁 싸 품에 안고 온 이 기부금은 아픈 몸을 이끌고 매일 새벽 같이 일어나 주운 폐지를 팔고, 기초생활수급비를 한푼 두푼 모아 만든 목돈이었다.

김 할머니는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북한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부모님을 여의고 (북한에서) 고아로 자랐다"며 파란만장한 삶을 털어놨다. "당(북한 노동당)이 폐병을 앓아 요양차 북한으로 온 4살 연상의 중국인 남성과 짝을 맺어줬어. 그런데 남편 병세가 악화해 함께 중국으로 탈북했지. 살기 위해서 동냥으로 남편을 먹이면서 9일 동안 산 넘고 물 건너 간신히 중국 남편의 고향으로 간 거야."

하지만 남편은 폐병이 계속 재발했고, 결국 눈을 감았다. 김 할머니의 나이 29세 때였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세 딸과 함께 30여 년간 입에 겨우 풀칠하며 힘겹게 살던 김 할머니는 50대 후반에 대한민국으로 건너왔다. 김 할머니는 "그때 한국이 살기 좋아져서 조선족들이 많이 가는 걸 보고 딸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막상 한국에 도착한 그는 아는 이 하나 없고, 물정도 몰랐지만 악착같이 생계를 이어갔다. 서울에서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가정부로 쉬지 않고 일했다. 몸이 크게 상해도 어쩔 수 없었다. 가정부를 그만둔 뒤 지인의 소개로 충남 서산 출신의 남성과 재가했지만, 고단한 삶은 변하지 않았다. 김 할머니는 "남편이 가족처럼 대하기는커녕 농사 일에 소처럼 부려먹으면서 무시하기만 했다"며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2년 만에 딸이 있는 대전으로 옮겨 살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대전으로 온 할머니는 새벽에는 건물 청소를, 낮에는 공공근로를, 오후부터 늦은 밤까지는 폐지를 줍는 생활을 반복했다. 보일러도 없는 월세 6만원짜리 방에서 생활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몇 년 뒤 몸을 누일 조그만 빌라를 장만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돼 최소한의 생활비 걱정도 덜었다. 하지만 파킨슨병과 심장병을 얻어 중환자실을 두 번이나 오갈 정도로 크게 몸이 아팠고, 병원비를 충당하느라 빌라를 처분해야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모은 돈을 선뜻 내놓은 것이다.

김 할머니는 "딸의 도움을 좀 받아 지금은 4,000만 원짜리 전세로 살고 있고 폐지를 줍고, 기초생활생계비도 받으니 굶어 죽지는 않았다"며 "이 나이에 내가 뭘 더 바라겠나.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그러면서 "나는 원래 주변의 도움을 잊지 못하는 성격"이라며 "나라의 도움을 받아 지금까지 살 수 있었으니 이제 거기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노영주 석봉동장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웃 사랑을 실천해 주신 어르신께 감사드린다"며 "베풀어주신 마음은 지역의 어려운 주민에게 소중히 전달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전= 최두선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