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떠보니 벌써 올해의 두 달이 지났습니다. 무도한 정치와 사회적 비극으로 우울하게 시작한 한 해였는데, 벌써 3월이 다가왔으니 놀랍습니다. 시간은 참 빠릅니다. 꽃피는 춘삼월이 가까워지니 여기저기 봄기운을 담은 축제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전국 팔도는 물론이고, 지역구에서도 여러 축제가 예정돼 있을 겁니다.
요즘 제 취미는 여행 유튜브 시청입니다. 몸은 집구석이지만 눈으로 세계일주를 하고 있습니다. 그중 알게 된 재밌는 축제가 바로 러시아의 마슬레니차입니다. 힘든 러시아의 겨울을 지나 맞이하는 봄이니 만큼 더욱 의미가 깊은 축제입니다. 이 축제의 가장 특이한 점은 '용서의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느 축제와 마찬가지로 먹고 즐기되 마지막 날에는 각자 잘못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마슬레니차는 기독교와 슬라브 민족의 토속신앙이 합쳐진 특이한 축제입니다. 슬라브계 토속신앙을 믿고 있는 현지 세력과 외부에서 온 기독교 세력이 생존을 위해 화합하는 과정에서 생긴 축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먹고살기 어려울 땐 서로 스치기만 해도 짜증이 납니다. 부족끼리 죽고 죽이는 일도 많았을 겁니다. 다시 한 번 같이 농사를 짓고 1년 먹을거리를 준비해야 하는 봄이 오니 지난 갈등에 대해 서로 사과하고 잘 살아보자는 종교적 의식이었을 겁니다. 서로 존중하는 마음에서 토속신앙과 기독교의 교집합이 있었을 겁니다.
한국은 갈등 공화국입니다. 영화 '베테랑'의 대사처럼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끝날 일이 어이없는 분쟁으로 번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단국대 분쟁해결연구센터에 따르면 매해 약 232조 원의 갈등 비용을 치르는데 2023년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10%에 달합니다. 과거 뜨거운 커피에 데이면 법원에 간다는 미국에 놀라던 우리가 이젠 걸핏하면 변호사를 찾습니다. 어느덧 대화와 사과, 타협보다 법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데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갈등의 해소는 법이 필요하지만, 어떤 갈등은 사과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공권력 개입 전에 대화와 소통만으로 진정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 점점 사과에 인색해지고 그 공간은 법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진심 어린 사과는 갈등을 해결하는 동시에 타인의 공감과 인정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려면 진심 어린 사과 및 반성 그리고 사후대책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그 사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 담대함도 필요할 겁니다. 그렇기에 사과는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박수 받을 만한 꽤 위대한 일입니다.
말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지만, 진심 어린 사과로 바로잡을 수 있는 일이 많다고 믿습니다. 어릴 때 친구들과 싸우면 부모님은 먼저 사과하라고 팔을 툭 밀치곤 하셨습니다. 아주 몇 초의 부끄러움만 극복하면 다시 뛰노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됐죠. 그러던 어린이들이 성인이 되니 사과할 줄 모르는 독불장군이 됐습니다. 고마운 일에는 감사를, 미안한 일에는 먼저 사과하는 마음가짐을 남은 한 해 동안 가져보면 어떨까요. 더불어 내게 사과하는 사람의 용기를 기꺼이 받아주는 넓은 마음도 가지면 좋겠습니다. 갈등공화국 시민으로서 가장 필요한 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