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통함'에 귀 기울이는가···'출생의 우연'을 넘어, '젠더 민주주의'를 향해

입력
2025.03.01 04:30
24면
<193> 다시 시험대에 오른 민주주의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젠더, 공간, 권력' 등을 쓴 안숙영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가 격주로 글을 씁니다.


다시 민주주의가 화두다. 느닷없는 비상계엄으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다시 시험대에 오른 요즘, 미국의 교육 지도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파커 J. 파머(Parker J. Palmer)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2012)을 다시 읽는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무엇"이며 "민주주의는 끝이 없는 실험"이라고 강조하는 파머는, 시민이 이룩한 최고의 정치적 성취로서의 민주주의가 지속되기 위해선 "우리 안의 차이를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끌어안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끝이 없는 실험으로서의 민주주의

우리가 민주주의를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으로 바라보며 민주주의의 수레바퀴를 다시 굴리고자 할 때,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의 하나는 다양한 얼굴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비통한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으로,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는 이들에 대한 존중이 부재하다는 점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는 일이다. 여성, 노인,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비통한 자들, 즉 '마음이 부서진 자들'을 구조적으로 양산하는 한편으로 이들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부정적 자화상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일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여성 혐오는 가장 많이 통용되는 용어의 하나가 됐고, 노인 혐오, 장애인 혐오, 성소수자 혐오, 이주노동자 혐오 등의 발언도 무비판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비통한 자들에 대한 주변화와 악마화도 가속화되고 있다.

따라서 "정치라는 것이 모든 사람을 위한 연민과 정의의 직물을 짜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버릴 때 우리 중 가장 취약한 이들이 맨 먼저 고통을 받는다"는 점을 기억하며, "불가피한 차이를 넘어 서로를 살아 있는 영혼으로 바라보는 능력"인 '존중의 상상력'을 키워가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다.

혐오가 만연한 사회의 '보이지 않는 권력'

혐오가 만연하게 된 배경에는 비통한 자들의 비통한 현주소가 개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처럼 비치게 하는 권력관계가 자리하고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스티븐 룩스(Steven Lukes)는 '권력이란 무엇인가: 3차원적 권력의 근본적 해부'(2024)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서의 '3차원적 권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가시적으로 행사되는 권력, 즉 눈으로 쉽게 관찰되는 물리적 권력으로서의 '1차원적 권력'과는 다르다. 쉽게 드러나지 않는 형태의 권력, 즉 간접적 형태의 권력으로 보통은 그것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젠더 권력이나 계급 권력 등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 단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최고 정치지도자, 즉 대통령은 전부 남성이었다. 그러나 이번 비상계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성 대통령들이 정치를 잘하거나 민주주의를 앞으로 밀고 나간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래서 남자는 대통령을 해서는 안 된다니까! 다시는 남자를 대통령으로 뽑지 말자'라는 식으로 대통령이 속한 '남성이라는 성별'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성이 대통령이던 단 한 번의 예외에서는 2017년의 탄핵 정국에서처럼 곧바로 '여성이라는 성별'이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되며 '다시는 여자를 대통령으로 뽑지 말자'로 논리가 비약한다. 물론 그 단 한 번의 예외도 아버지의 후광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더불어 얼마 전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해 3,465억 원을 배당받아 개인별 배당 1위를 기록했다. 100억 원도 아니고 1,000억 원도 아니고 3,000억 원하고도 465억 원이 더해진 금액이라니, 그것도 겨우 1년에··· 나로서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금액인지 상상조차 어렵다.

올해 최저임금인 시간당 1만30원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니, 노동자 한 명이 하루 8시간씩 주 5일, 즉 주 40시간을 일해서 받는 월급이 209만6,270원이고, 연봉으로 산정하면 2,515만5,240원이다. 누군가는 배당으로만 3,465억 원을 받을 때, 누군가는 임금으로 2,500만 원을 받는다는 의미다.

그런데 최저임금조차 못 받는 노동자도 여전히 존재하며 그 가운데 다수는 여성이다. 노동을 통해서는 부자는커녕 기본 생활을 영위하기도 쉽지 않은 게 우리 사회의 어두운 현주소다. 그런데도 '부자 되세요'나 '돈방석에 앉으세요'가 흔한 인사말이 됐고, 배당의 최고 한계를 정하자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려운 반면, 최저임금 1만 원 시대의 시작으로 자영업자가 다 죽어간다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이처럼 '최고배당'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데 '최저임금'은 커다란 문제인 것처럼 담론화되는 우리의 불평등한 현실은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서의 젠더 권력과 계급 권력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출생의 우연'을 넘어, 젠더 민주주의를 향해

보이지 않는 권력 관계들이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구조적으로 틀 지우고 있는 가운데, 그렇다면 파머가 말하는 "민주주의 숲에서 자라나는 다양성"으로 어떻게 나아가며 민주주의를 더 폭넓게 사고할 수 있을까? "우리를 갈라놓은 모든 것을 넘어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에 대한 더 포괄적인 개념의 민주주의"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무엇이 시급하게 필요할까?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혐오의 배경으로 작동 중인 보이지 않는 권력들, 즉 젠더 권력, 계급 권력 및 인종 권력 등을 '보이도록' 만드는 작업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권력들이 사실상은 '출생의 우연'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출발점인 출생 자체를 비롯해 이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성별, 계급, 인종 등을 선택해 태어날 수 없다. 어떤 성별, 어떤 계급, 어떤 인종 등으로 이 세상에 오는지는 우리의 노력이나 선택과는 무관한, 그저 출생의 우연에 불과하다.

따라서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가 되려면 이러한 차이를 근거로 개인이나 집단에 가해지는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차이로 인해 '기울어진 운동장'을 어떻게 하면 '평평한 운동장'으로 바꿔나갈 것인가를 탐색해야 한다.

미국의 지리학자인 하름 데 블레이(Harm de Blij)가 '공간의 힘: 지리학, 운명, 세계화의 울퉁불퉁한 풍경'(2009)에서 강조하는 '공간의 짐'으로 우리가 시선을 돌려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우리 모두는 태어난 곳과 모국어, 신념 체계와 보건 환경, 환경적 규범과 정치적 상황 등의 공간의 짐을 지고 있으며 그것은 축복인 동시에 장애물이기도 하다. 같은 공간이라도 남성과 여성에게 상반되는 기회와 장애물을 준다"는 점을 기억하며 "오늘날 가장 외딴곳의 촌락에서부터 가장 중심지에 있는 나라에 이르기까지, 성 불평등은 공간의 풍경을 여전히 왜곡시키고 있다"는 진단에 따라, 여성과 남성이 '같은 공간, 다른 운명'에 놓인 현실을 논의의 장으로 다시 소환해야 한다.

새롭게 열린 광장에서 비통한 자들로서의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고 있는 가운데, 이들의 참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새로운 민주주의로의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미국의 여성학자 벨 훅스(bell hooks)가 '페미니즘: 주변에서 중심으로'(2010)에서 강조하는 페미니즘의 정의를 새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훅스는 페미니즘을 '성차별적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으로 정의하며 '지배 체제' 자체에, 즉 '성별·인종·계급의 억압의 상호 연관성'에 주목할 것을 우리에게 요청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도 출생의 우연을 바탕으로 구조화된 지배체제 그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며 '남성의 얼굴을 한 민주주의'를 넘어 '젠더 민주주의'로의 새로운 길을 열어가야 할 때다.

안숙영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