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불면 설렌다. 연분홍 치마에 흩날리는 꽃잎 때문이다. 벌과 나비의 날갯짓이 화려해지는 것도 나와 같은 이유일 게다. 날갯짓에 이리저리 튕겨진 햇살이 꽃들에게 가서 닿자 봉오리가 벙긋벙긋 웃는다. 저 해맑은 웃음은 달래 냉이 씀바귀 쑥에게 손짓할 것이다. 저 보드라운 웃음은 산과 들의 겨드랑이도 간지럽힐 게다. 에취! 산과 들이 몸을 크게 떨며 재채기를 하자 봄물이 제대로 올랐다. 분홍과 연둣빛, 봄이 고운 색을 입었다.
봄바람을 온전히 믿진 않는다.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게 봄바람이다. 이름도 한둘이 아니다. 보드랍고 화창한 ‘명지바람’, 솔솔 부는 ‘실바람’, 향기로운 ‘꽃바람’은 듣기만 해도 설렌다. 마음이 다 풀어질 즈음 봄바람은 슬슬 심술을 부린다. 꽃을 시샘하는 ‘꽃샘바람’과 살을 파고드는 ‘살바람’으로 온 세상을 움츠러들게 한다. “봄바람에 여우가 눈물 흘린다” “2월(음력) 바람에 김칫독 깨진다”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꿈과 그리움을 한아름 안은 ○○○○가 피어오르면 마음을 놓아도 된다. 아른아른, 아물아물과 잘 어울리는 이것은 따스함 그 자체이니까. 시와 노랫말에 곧잘 등장하는 이것은 아지랑이일까, 아지랭이일까.
소리를 내 보면 아지랭이가 입에 척 달라붙는다. ‘-랑이’보다 ‘-랭이’가 말하기 편한 건 뒤에 있는 ‘이’ 때문이다. 어떤 음운이 뒤에 오는 ‘ㅣ’의 영향을 받아서 그것과 비슷하거나 같게 소리가 나는 현상을 ‘ㅣ’모음 역행동화라고 한다. 가랑이 지푸라기 호랑이 곰팡이 가자미 고기 아비 어미를 [가랭이 지푸래기 호랭이 곰팽이 가재미 괴기 애비 에미]라고 소리 내는 게 대표적인 말들이다. 지방에 가면 흔히 들을 수 있는 정겨운 말소리다.
눈치챘겠지만 앞의 낱말들이 바른 말이다. 표준어 규정은 ‘ㅣ’모음 역행동화 현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신경 써서 소리 내면 피할 수 있는 발음이라서 동화된 형태를 표준어로 삼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말이 너무 많다. 만약 이들 낱말을 모두 표준어로 인정하면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손잽이'가 아닌 손잡이가 표준말이듯 ○○○○의 바른 말은 아지랑이다.
유독 짧아서 소중한 봄이다. 아지랑이가 옆구리 툭툭 칠 때 맘껏 즐겨야 한다. 박인희의 노래 ‘봄이 오는 길’을 부르니 꽃샘추위도 사르르 녹았다.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네/ 들 너머 고향 논밭에도 온다네/ 아지랑이 속삭이네 봄이 찾아 온다고/ 어차피 찾아오실 고운 손님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