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플러스 바로 보기 | 6부작 | 15세 이상
명품 브랜드 발렌시아가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발렌시아가가 누구로부터 비롯됐는지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유럽 명품 대부분이 그렇듯 유명 디자이너의 이름을 땄으리라는 추측을 하는 정도다.
발렌시아가 역시 사람 이름에서 나왔다. 스페인 사람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1895~1972)다. 그는 20세기 중반 세계 패션 수도 파리를 쥐락펴락했던 인물이다. 잠깐, 아무리 유럽이 국경 경계가 흐리다고 하나 스페인 사람이 프랑스 패션을 주도했다고? 드라마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나 알아두면 제법 흥미로운 인물 발렌시아가의 파리 전성기를 돌아본다.
발렌시아가(알베르토 산후안)는 어려서부터 재봉 기술이 탁월했다. 스페인 귀족 눈에 띄어 맞춤복을 만들기 시작했다. 산세바스티안에 자기 점포를 열고 '성공 시대'를 이어갔다. 그는 1937년 마흔이 넘어서야 파리로 진출한다. 우정을 나누던 유명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1883~1971)의 권고가 컸다. 스페인 내전(1936~1939)이라는 불안정한 정국이 한몫하기도 했다. 공화파를 지지해 스페인에 머물기 곤란해진 사업가 라몬(아담 퀸테로)이 동업자로 나선다.
파리에 연 '발렌시아가 하우스'는 패션가의 눈길을 끈다. 하지만 손님이 몰리지 않는다. 발렌시아가는 고지식하다. 좋은 옷을 만들면 손님이 많이 찾아주리라 단순히 생각한다. 이제 막 파리에 자리 잡은 발렌시아가를 알아주는 이는 없다. 발렌시아가는 스페인풍을 강조한 옷으로 돌파구를 연다.
시련을 극복하면 다른 시련이 따른다. 사업이 조금 안정될 무렵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터지고, 종전 이후에는 새 라이벌 크리스티앙 디오르(1905~1957)가 등장하는 식이다. 발렌시아가는 파리를 점령한 나치에 영업 정지를 당하고, 전쟁이 끝난 후 등장한 대중 소비 사회에 위기감을 느끼기도 한다. 발렌시아가는 철저히 맞춤복을 만들어 파는 '오트 쿠튀르'를 지향하나 기성복을 만드는 '프레타포르테'가 패션 주류로 떠오른다.
발렌시아가는 강박에 가까운 완벽주의로 위기를 넘긴다. 그렇다고 세상의 변호를 온전히 거스를 수는 없다. 그는 프레타포르테가 패션계를 지배하자 미련 없이 떠난다. "명예는 영원하고 명성은 잠깐이다"라는 발렌시아가의 말은 그의 자존심을 대변한다.
20세기 중반 패션계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발렌시아가는 은둔형 유명 인사였으나 패션계 거물과 활발히 교류했다. 나치와의 협력을 마다하지 않던 자기중심적 인물 샤넬, 재능보다는 마케팅 감각이 남달랐던 디오르, 발렌시아가가 '흑심'을 품고 밀어줬던 위베르 드 지방시(1927~2918) 등의 면모가 발렌시아가 시선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