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지 않고 필사를 한다

입력
2025.02.07 04:30
27면
'가성비 독서' 필사 열풍 이면
필사 책이 원작보다 잘 팔려
지혜·통찰 독서 본질 찾아야

책을 읽지 않고 베껴 쓴다. 필사(筆寫)가 때아닌 열풍이다. 시대를 초월한 고전, 소설, 시집, 에세이는 물론이고 격언, 성경, 헌법, 드라마 대본까지 필사 분야는 무한 확장하고 있다. 필사를 위한 책도 나왔다. 원작을 필사하라고 만든 책이 원작보다 더 팔린다. 필사 모임이 성행하고 필사 인증샷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도배한다. 필사를 위한 펜과 노트도 불티나게 팔린다. 인상 깊은 책 구절에 밑줄 치거나 마음에 남은 단락을 통째 찍는 필사의 아류(亞流)도 등장했다.

필사는 가성비 좋은 독서다. 다 읽지 않아도 단 한 줄로 책의 핵심을 꿰뚫는다. 책이 없어도 읽고 쓴다. 필사를 다시 베끼는 재활용도 가능하다. 돈 한 푼 들이지 않아도 효과는 독서에 버금간다. 한 자 한 자 공들여 쓰는 행위는 성취감을 높이고 필사한 문장들은 머리와 가슴에 각인된다.

SNS에는 필사 간증이 넘친다. 말랑말랑한 사랑 표현을 베끼며 설렘이 폭발했다는 이들의 수줍은 고백은 웬만한 연애소설보다 달콤하다. 유명 아이돌그룹의 멤버가 추천한 책의 불교 경전 한 구절을 따라 쓴 필사 댓글엔 ‘힐링’. 요즘 같은 난국에 헌법을 따라 쓰며 민주주의를 되새겼다는 증언은 성경을 필사한 중세 유럽 수도사의 비장함과 맞먹는다.

가히 필사는 독서 암흑 시대의 구세주. 2023년 정부가 발표한 국내 성인 종합독서율(최근 1년 내 종이책·전자책·오디오북 중 1권 이상 읽은 비율)은 43%로 10년 연속 곤두박질쳤다. 실제 주요 필사 연령인 20대 독서율은 74.5%로 전 연령대를 압도한다. 위기의 출판업계도 필사에 필사(必死)적이다. 출판사들은 고전에서 발췌한 명언 등으로 구성된 필사 책을 재빨리 내놨다. 서점들은 필사 책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필사 도구까지 얹어 판다. 필사 챌린지, 필사 대회도 흥행이다.

필사 열풍은 난세가 만들었다. 어지럽고 혼란한 시국일수록 지혜와 통찰이 강하게 요구되는 법. 지혜와 통찰은 독서의 본질이다. 오랜 시간 깊이 사유하면서 읽고 얻은 지식이 개인의 삶에 스며들 때 지혜가 나온다. 책에 담긴 내용을 곱씹어 개인의 경험에 비추어 성찰할 때 비로소 통찰이 생긴다.

독서는 가성비를 따질 수 없다. 책 읽기로 사유의 근육을 키우고 책을 뛰어넘는 세계를 만들 때 독서의 가치는 증명된다. 아무리 현대 사회의 미덕이 가성비라지만, 자신의 입맛에 맞는 짤막한 몇 문장을 베끼는 것으로 독서를 갈음한다면, 필사 열풍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레시피를 베껴 쓴다고 요리가 완성되지 않고, 헌법을 따라 쓴다고 민주주의를 성취할 수 없듯이.

때마침 나온 통계가 필사 열풍에 앞장선 출판업계에 경종을 울린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알려진 지난해 10월 서적·출판업 생산은 전년 대비 2.8% 증가해 9개월 만에 반등했다. 완독이 어렵다는 한강의 작품을 정직하게 읽으려는 이들이 위기에 빠진 독서를 구해냈다.

반문해야 한다. 필사가 정말 독서를 구할 수 있을까. 남의 글을 따라 쓰는 데 그쳐선 안 된다. 자신만의 생각과 통찰이 담긴 글을 써야 한다. 필사에서 시작된 열풍이 독서로 이어져야 한다. 필사는 독서를 대체할 수 없다.


강지원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