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 2023년 전미도서상 번역 부문 최종 후보, 2025년 미국 필립 K. 딕상 최종 후보. 자신을 ‘최종 후보 전문 작가’라고 말하는 소설가 정보라(49)의 이력이다. 정 작가는 23일 한국일보 서면 인터뷰에서 자신을 향한 세계 문학계의 거듭되는 호명에 대해 “번역의 힘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해외 문학계가 내 작품을 딱히 더 좋아하는 게 아니라 국내외에서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즐기며 번역하시는 분이 늘어난 덕을 덩달아 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 작가의 이름을 세계 3대 공상과학(SF) 문학상인 필립 K. 딕상의 후보로 올린 건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된 소설집 ‘너의 유토피아’다. 2021년 출간된 '그녀를 만나다'의 영역본으로, 국문판도 최근 같은 제목으로 개정됐다. 한국 작가가 한국어로 쓴 작품이 이 상의 후보가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번역은 그를 부커상과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로 만든 소설집 ‘저주토끼’를 영어로 옮긴 안톤 허 번역가가 맡았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18년 서울의 한 책축제에서 허 번역가가 ‘저주토끼’를 우연히 읽고 “번역하고 싶다”고 제안하며 시작됐다. 정 작가는 “’안톤 선생님’이 나를 선택해서 좋은 성과를 내고 계시고,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며 “내가 선생님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성과를 내는 비법이라고 믿고 있다”고 했다.
이 소설집은 코로나19 팬데믹과 성전환 수술 이후 강제 전역 조치를 당한 고(故) 변희수 하사, 대기업의 자원 독점 등 현실 속 생존과 상실을 인간이 사라지고 기계만 남은 세계, 식인(食人)을 유발하는 전염병 같은 초현실적인 요소로 풀어낸다. 정 작가는 “‘너의 유토피아’에 실린 소설은 대학 강사 시절 ‘SF를 통한 자아의 발견’이라는 수업에서 영감을 얻었다”라고 설명했다. 이 수업에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학생들과 토론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쓴 소설이라는 것. 정 작가는 “매 학기 인간의 특성은 정의하려고 하면 할수록 모호해지고 차별과 배제의 가능성만 커지기 때문에 정의하지 않는 쪽이 옳다는 결론에 도달하곤 했다”고 귀띔했다.
자신의 취미를 ‘데모’라고 밝히고 활동가로도 활동하는 정 작가에게 생전 “내가 옹호하는 대의는 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의”라면서 전체주의에 반대했던 미국의 유명 SF 작가 필립 K. 딕을 기리는 문학상은 누구보다 더 어울린다. 최근에도 12·3 불법 계엄에 반대하는 탄핵 집회와 경북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 농성 1주년 기념집회 등에 참석한 그다.
“요즘 데모할 거리가 많다”는 정 작가에게 오늘날 한국 사회의 ‘유토피아 척도’를 물었다. 소설집 표제작에서 질병 징후나 부상, 통증 정도를 1부터 10까지 수치화해 묻는 진단 설문용 로봇의 질문을 빌렸다. 정 작가가 꺼내든 숫자는 ‘3’이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변화의 한복판에서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향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절망과 희망이 같이 있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