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땅에서 걷겠다" 나훈아, 58년 음악 인생 마침표 찍다

입력
2025.01.1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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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공연으로 은퇴하는 가황
1967년 데뷔... 1,200곡 발표
800여 곡 직접 만든 장인 정신
"왼쪽, 니는 잘했나" 작심 발언

“저는 이제 마이크를 내려 놓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대신 불러주십시오.”

'가황' 나훈아(78)가 작별을 고했다. 그의 은퇴 투어 '라스트 콘서트- 고마웠습니다'의 종착지인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옛 체조경기장)에서 지난 10일 공연을 마친 그는 마이크를 드론에 내려놓고 거수경례를 했다. 이어 관객을 등지고 무대 위 계단에 오른 나훈아는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사라졌다.

'고향역' '무시로' '사내'... 가황의 마지막 공연

나훈아가 58년 음악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지난해 2월 “박수 칠 때 떠나라는 진리를 따르고자 한다”면서 가요계 은퇴를 선언한 뒤 같은 해 4월 인천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팬들과 만난 후 12일 서울 공연을 끝으로 반세기 넘게 이어진 가수 활동을 마감했다.

무대에선 그의 은퇴를 실감할 수 없었다. 나훈아는 ‘고향역’을 시작으로 2시간 30분 동안 ‘18세 순이’ ‘홍시’ ‘무시로’ ‘고향으로 가는 배’ ‘테스형’ 등 20여 곡을 부르면서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농담 섞인 부산 사투리로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를 연출한 그는 “꾹꾹 참고 끝까지 울지 않으려 하고 있다”면서도 마지막 곡 ‘사내’를 부르면서는 끝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나훈아는 국내 대중음악 역사에 굵은 획을 그은 인물이다. 어릴 적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1967년 데뷔해 이듬해 ‘내 사랑’ 발표와 함께 정식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남성적인 거친 외모와 말투로 무장한 카리스마에 감성을 자극하는 특유의 '꺾기' 창법으로 순식간에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이날 관객들에게 “남들이 대한민국에서 뒤집고 꺾고 하는 거를 내가 제일 잘한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내가 만든 것”이라며 껄껄 웃었다.

나훈아는 데뷔하자마자 ‘사랑은 눈물의 씨앗’ ‘임 그리워’ ‘고향역’ ‘물레방아 도는데’ 등의 잇단 히트와 함께 동료 가수 남진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1970년대 초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영화에도 주연으로 출연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최규성 대중음악평론가는 “나훈아는 남진과 라이벌 대결을 통해 가요계에 팬덤 문화의 장을 열었다”면서 “이 같은 경쟁 구도는 공연의 내용과 형식이 발전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1976년 군 제대와 함께 이혼, 배우 김지미와의 결혼 선언 등으로 팬들을 놀라게 한 뒤 가요계를 떠났던 나훈아는 1982년 복귀해 ‘울긴 왜 울어’ ‘잡초’를 크게 히트시켰고 이후 ‘사랑’ ‘18세 순이’ ‘무시로’ 등을 내놓으며 전성기를 확장했다. 나훈아는 이번 공연에서 “우리끼리 얘기인데 세계 가수 중에서 직접 작사∙작곡해 부른 노래가 가장 많고 히트곡도 가장 많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50여 년간 그가 발표한 노래는 1,200여 곡으로 이 중 800여 곡을 직접 작사, 작곡했다.

나훈아는 음악에 관해선 종합 예술가였다. 일찌감치 1인 기획사 시스템을 구축해 스스로 신비주의 이미지를 만들었고 콘서트도 매번 직접 기획하고 연출하며 완벽을 기했다. 그가 최근까지 ‘테스형’ ‘기장갈매기’ 등의 신곡을 내며 50년 넘게 인기를 모을 수 있었던 건 직접 곡을 쓰는 싱어송라이터여서가 아니라 이처럼 부단히 연습하고 노력하며 창작하는 장인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는 “나훈아는 지방에서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차에서 곡을 쓸 정도로 음악에 젼념하는 집중도가 대단한 음악가”라고 평가했다.

"느그 꼬라지, 국민 위한 짓거리냐" 작심 발언

높은 인기만큼이나 구설에도 자주 오르내렸다. 세 번의 결혼과 이혼으로 뉴스를 장식했고, 2008년 여배우와 염문설∙신체절단설 등 소문이 퍼지자 기자회견을 열어 “내가 직접 보여줘야겠느냐”며 바지를 내리려던 사건은 지금도 자주 회자된다. 정치권에서 정계 입문 제의도 끊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정말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면 노래를 불러야 한다”며 "거절했다”고 밝혔다. 재벌가의 사적인 공연 요청에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티켓을 사서 콘서트에 오라”고 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이번 공연에서는 정치권을 향해 작심 발언도 쏟아냈다. 지난달 7일 대구 공연에서 12·3 불법계엄 사태와 관련 발언이 논란이 되자 이날 공연에서 해명했다. 나훈아는 왼팔과 오른팔을 들어보이며 "이제 그만두는 마당에 아무 소리 안 할라 캤는데, 왼쪽이 오른쪽을 보고 잘못했다고 생난리다"며 "(왼팔을 가리키며) 니는 잘했나"고 소리쳤다. 사태 이후 극단으로 치우친 정쟁을 왼팔과 오른팔에 빗대 비판한 것. 그의 쓴소리는 계속됐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하고 생지X을 하고 난리가 났지요. 묻고 싶습니다. 느그 지금 하고 있는 꼬라지들이 정말 국가를 국민을 위해서 하고 있는 짓거리인지."

"구름 위를 걸었다. 이제 땅에서 걷겠다"

나훈아는 20여 년 전부터 정상에 있을 때 은퇴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이번 투어에선 “5, 6년 전 부산 공연을 마치고 나오는데 하얀 머리 할머니가 손을 흔들며 ‘오빠’라고 외치는 걸 보고 내가 ‘할배’가 됐구나 하고 느껴 은퇴를 생각하게 됐다”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스타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바람을 자주 언급했다. 2020년 KBS 추석 특집 공연에서 어떤 가수로 남고 싶냐는 질문에 “흐를 유(流), 행할 행(行), 노래 가(歌), 유행가 가수가 무엇으로 남는다는 말 자체가 웃기는 얘기”라고 눙치기도 했다.

“여러분, 저는 구름 위를 걷고 살았습니다. 왜냐면 별, 스타였으니까. 그게 좋을 것 같아도 사람이니까 별로 사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땅에서 걸으며 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마이크를 놓는다는 이 결심입니다.”

고경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