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남북관계 긴장감을 확 끌어올린 북한의 ‘쓰레기 풍선’ 도발이 잠잠해졌습니다. 지난해 5월 28일 북한의 첫 쓰레기 풍선(당시 '오물 풍선')이 남쪽으로 날아온 후 11월 29일까지 32차례에 걸쳐 살포됐지만, 이 기상천외한 공세는 공교롭게 12·3 불법계엄 ‘투톱’으로 꼽히는 윤석열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직무가 정지된 뒤로 뚝 끊긴 모습입니다.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로 직무가 정지된 윤 대통령과 구속기소된 김 전 장관이 계엄을 선포하는 과정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야권을 중심으로 군 차원의 ‘북한의 도발 유도’ 의혹이 폭넓게 펼쳐졌습니다. ①김 전 장관이 쓰레기 풍선이 날아온 지점을 향한 ‘원점 타격’을 지시했다는 의혹부터, ②10월 평양 무인기 침투 ③이를 활용한 국군심리전단 차원의 대북전단 대량 살포 의혹 등이 대표적이죠. 이 가운데 군은 김 전 장관이 합동참모본부에 ‘원점 타격’을 지시했다는 의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긍정도 부정도 않는 ‘NCND(neither confirm nor deny)’ 대응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11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군 차원의 대북전단 살포는 어느 정도 사실에 근접한 것으로 보입니다. 합참은 군 차원에서 대북전단을 살포했다는 의혹에 대한 입장을 묻는 한국일보 질의에 "군사작전 시행의 사실 관계 확인은 관련 주장들의 진위 여부를 떠나 군사적 측면에서 적절하지 않다"는 답변을 내놨습니다.
지난달 31일 부승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SBS라디오에 출연해 "우리 군이 북한의 도발을 유도하려는 것 같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주장한 뒤, 국군심리전단 내부에서도 유사한 주장이 나온 사실이 추가 보도된 것에 따른 입장입니다. 군 차원에서 평양에 무인기를 보낸 게 맞는지를 묻자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답변한 것과 대동소이합니다.
대남 쓰레기 풍선의 원인 제공처라며 눈총을 받던 탈북민 단체들도 군 차원의 대북전단 살포가 이뤄졌을 것으로 확신하는 분위기입니다. 지난해 대북전단을 보낸 건 맞지만, 하반기 들어 지방자치단체의 단속과 주민 반발이 거세지는 바람에 대북전단 등을 거의 못 보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국내에서 대북전단을 가장 많이 보내기로 소문난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표는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민간에서 (대북전단을) 보내 봐야 얼마나 보내겠느냐”며 북한이 쓰레기 풍선을 한 번에 수백 개씩 날릴 정도로 명분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이 대표는 지난해 하반기 대북전단 살포가 얼마나 어려운 여건이었는지 생생히 풀어놨습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부터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얼마나 보내지 말라고 날뛰었는지 모른다. 접경지 주민들, 청원경찰 등도 너무 (우리에게) 뭐라고 해서 나도 거의 못 날렸다. 내가 못 날렸으면 다른 단체나 사람들은 더 못 날렸을 것”이라는 게 그의 하소연입니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를 포함한 민간에서 북으로 날린 풍선 양만으로는 북한이 그 정도로 대응할 수준이 절대 아니었을 것이란 얘기죠.
이 대표는 군 차원에서 대북전단을 보냈을 거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전단 살포를) 했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도 "대북전단을 무조건 나쁘게만 봐선 안 된다"고 덧붙였습니다. 북한이 대량으로 보내니 우리 군도 마땅한 대응 차원에서 보냈을 것으로 그는 믿었습니다. 과거 대북전단 ‘모델’로도 등장했던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역시 “대북 확성기와 대북전단은 쌍끌이 심리전 수단으로 보면 된다”며 “대북확성기가 재개됐다면 전단 살포가 이뤄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이 대표와 안 소장 말대로 군의 대북전단 살포가 북한 쓰레기 풍선 살포에 대한 대응 차원, 혹은 전시 심리전 수단이었다면 문제 삼기는 어렵습니다. 1950년 6·25전쟁 당시부터 최근까지도 남북은 서로 숱한 심리전단을 뿌려왔기 때문이죠. 최근 찾아가 본 강원 고성군 ‘DMZ박물관’의 심리전단 전시물을 보면, 6·25전쟁 당시엔 “살려면 넘어오시오”라는 내용 등이 담긴 귀순(투항) 권유 심리전단이 대다수였습니다.
당시에도 우리 군은 귀순 시 직업 공부를 시켜주고 휴게시간, 좋은 음식을 제공한다는 내용은 물론 ‘(귀순)축하엽서’나 ‘안전보장 증명서’ 형태의 심리전단을 인민군 주둔지를 향해 보냈다고 합니다. 경제가 급성장한 1980~90년대엔 연예인이나 서울의 야경, 배불리 먹는 모습 등을 담았고요. 반대로 북한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비판과 대통령을 희화화한 모습들을 주로 담았습니다. 이렇게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뿌려진 전단들은 무려 28억 장에 달합니다.
최근엔 우크라이나의 전장에서 북한군을 겨냥한 ‘한글 심리전단’이 무사히 뿌려졌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전에 투입될 북한군의 탈북을 유도하는 심리전 자료를 주한우크라이나 대사관에 전달한 장세율 겨레얼통일연대 대표는 “최근 우크라이나 측으로부터 우리가 제공한 콘텐츠는 유용하게 쓰고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며 “우리가 작성해 보내준 내용과 일맥상통하지만, 디자인을 많이 바꿔 (심리전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전했습니다. 장 대표 측이 보낸 심리전단 형태를 우크라이나에서 재구성해 적절히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다만 전문가도, 탈북민 단체조차 전장에서 적군 사기를 꺾을 목적 등으로 활용돼야 할 심리전단이 국내에서 계엄 선포를 위해 북한의 도발을 유도하려고 활용됐다면 큰 잘못이라고 지적합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군이 무인기와 대북전단을 북한에 보낸 점은 어느 정도 사실로 드러난 상태라고 진단하면서 “윤 대통령이 북한을 자극한 카드를 대내 정치용으로 쓰려고 했다는 점은 아주 나쁜 선택”이라며 “수사 과정에서 관련 의혹을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고 꼬집었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대북전단 살포 목적을 비판만 해서는 안 된다던 이 대표 역시 “(북한이 가만히 있는데) 우리 군이 먼저 전단을 보냈다면 문제가 있다고 본다”고 했습니다.
만일 군의 대북전단 살포가 사실이고, 그 목적이 계엄을 위한 '빌드업'이었다면 그간 북한의 대남 쓰레기 풍선 살포를 ‘도발’로 간주했던 우리 군과 정부의 그간 주장도 상당히 궁색해집니다. 무엇보다 대북전단과 쓰레기 풍선이 남북을 오가는 사이 접경지와 수도권 거주 주민들은 불안과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배신감도 상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12·3 불법계엄 관련 수사 과정에서 계엄 선포를 위해 북한의 도발을 유도하려고 했다는 의혹들을 명백히 규명해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