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에나 우리는 있었다"… 국내 최초의 퀴어 역사책

입력
2025.01.1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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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인·한채윤 '퀴어 한국사'

"우리는 생각보다 오래됐고, 오래 버텨 왔고, 오래 살아갈 존재들이다."

단군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에 숨겨진 퀴어의 흔적을 찾아 보여주면서 "한반도 역사에서 퀴어가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고 역설하는 책이 나왔다. 성소수자 인권활동가 한채윤 비온뒤무지개재단 상임이사와 루인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소장이 함께 펴낸 '퀴어 한국사'다.

퀴어한 365개 순간… "우리에게도 역사가 있다"

두 사람이 5년 동안 공동 집필한 책은 "최초의 한국 퀴어 역사책"이라 할 만하다. 한 상임이사는 "근대까지는 온갖 기록을 뒤지고 뒤졌다"며 "적어도 1980년대까지 퀴어의 역사는 국내 그 어떤 기록보다 시기별로 잘 정리된 책이라고 자부한다"고 했다. 책은 한국의 성소수자 관련 역사를 수집·보관·관리하기 위해 2009년 출범한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설립 10주년을 기념하며 '퀴어의 역사를 정리해보자'는 두 사람의 작당 모의로부터 시작됐다. 우여곡절 끝에 원고지 4.5매 안팎 분량의 글 365개 꼭지로 묶어냈다. 부제는 '1일 1페이지 퀴어한 역사 읽기'.

책은 아내 노국공주를 무척 사랑했지만 남성들과 성관계도 즐겼던 고려 공민왕이나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가 시로 남긴 소년을 사랑한 한 고승의 이야기, 19세기 조선의 '남색'을 기록한 일본인의 기행문, 1920년대 신문·잡지에 소개됐던 당시 신여성들의 '동성연애' 등까지 꼼꼼히 담고 있다. 다만 성소수자가 직접 남긴 기록이 적은 탓에 1980년대까지 사건은 전체의 5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1990년대 기점 성소수자 인권운동 가시화

한 상임이사가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첫발을 디뎠던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활발해지던 2000년대, 혐오에 뜨겁게 맞섰던 2010년대 기록이 차고 넘치는 것과 대조적이다. "수많은 퀴어들이 직접 활동하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분량이 많은 게 당연하고, 그 자체가 역사의 흐름을 보여준다"는 게 그의 설명.

그런 이유로 대중이 기억하는 유명한 사건보다는 "덜 알려져 있지만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야 할 사건을 기록하는 데 좀 더 힘을 기울였"단다. 이를테면 국내 최초의 게이 커플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알려진 2013년 김조광수·김승환 부부보다 훨씬 앞선 2004년 서울 종로 게이 바에서 공개 결혼식을 올린 한 커플을 언급하는 식이다. 트랜스젠더가 널리 알려진 시기는 2001년 하리수의 등장 이후지만 책은 훨씬 이전부터 이들의 삶을 기록한 자료를 찾아 소개하기도 한다. 저자들은 동성애와 서울, 유명인 위주로 치우치지 않도록 트랜스젠더나 무성애, 지역 등까지 두루 안배했다. 한 상임이사는 "그럼에도 빠진 것과 새로운 것을 채워 넣어 개정판을 내는 게 앞으로 너무 너무 중요할 책"이라면서 "다른 분들의 여러 작업들도 책으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권영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