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작가 알바 데 세스페데스(1911~1997)의 장편소설 '금지된 일기장'의 주인공 '발레리아 코사티'는 "반질반질하고 새까만 표지의 두툼한, 학생들이 흔히 쓰는 평범한 공책"에 일기를 쓰면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은행원인 남편과 아들, 딸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발레리아는 넉넉한 형편은 아닐지라도 행복하고 무난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일상을 되돌아보고 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이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균열을 느낀다.
1950년 11월부터 1951년 5월까지 약 반년가량 이어지는 발레리아의 일기에는 엄마가 아닌 마흔셋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찾는 과정과 그의 내적 번민이 고스란히 기록된다. 발레리아는 말한다. "일기장의 은밀한 존재는 내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지만, 솔직히 그 덕분에 내 삶이 더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남편의 담배를 사러 간 가게에서 발견한 일기장을 사고 나서야 발레리아는 집에 자신을 위한 공간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의 일기장은 가족의 눈을 피해 빨래 주머니와 여행 가방, 서류 보관함 등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신세다. 내내 집안일을 하다가 겨우 가족들 사이에 자리를 잡을라치면 또 다른 일거리를 부탁받고 일어나야 하는 발레리아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이런 그에게 일기는 결혼한 지 23년 만에 처음으로 갖는 자신을 위한 시간이자 '자기만의 방'인 셈이다. 가족에게 일기장을 들킬라 두려워하면서도 발레리아는 계속 글을 쓴다. 자신을 이름이 아닌 '엄마'라고 부르며 제2의 엄마로 대하는 남편과 아이들, 특히 딸과의 다툼, 또 마음을 환히 빛나게 하는 누군가의 존재까지.
'금지된 일기장'의 배경인 1950년은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서 어려움을 겪던 시기다. 소설 곳곳에서 전쟁의 상흔과 더불어 왕정 시대에서 공화정으로 가는 혼란이 드러난다.
발레리아부터가, 몰락 귀족으로 평생 사람을 부려 온 그의 어머니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하는 여성'이다. 하지만 발레리아는 새로운 변화에 기꺼이 자신을 맡기는 진취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는 "가정의 경제적인 책임을 오롯이 남편에게 맡기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는 자신의 어머니를 '해묵은 종교화 인쇄물'처럼 바라보면서도 정작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딸은 마땅찮게 여긴다. 딸보다 똑똑하지 못한 아들은 마냥 안쓰럽고, 요리처럼 여자가 할 일을 남편이 돕는 일은 부끄러운 발레리아다.
'금지된 일기장'의 작가 세스페데스는 최근 세계 문학계에서 재조명된 인물이다. 1911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파시스트 정권에 반기를 들다 작품이 금서로 지정됐는데도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널리 인기를 끈 작가였다. 그러나 페미니즘이라는 주제와 독자층이 주로 여성이라는 점, 여성 작가라는 이유가 맞물려 '로맨스 소설'로 치부되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장편소설 '나의 눈부신 친구' 등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작가 엘레나 페란테가 세스페데스의 소설을 "용기를 주는 작품"이라고 밝히고 줌파 라히리와 아니 에르노 등이 찬사를 보내며 그를 다시 읽으려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금지된 일기장'은 한국에 소개되는 세스페데스의 첫 책이다.
눈가리개가 벗겨진 채 세상을 보게 된 발레리아는 고통의 원인을 일기장으로 보고 이를 불태우려 한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일기장을 없앤대도, 마음속에 '금지된 일기장'을 갖게 된 그의 삶은 결코 이전과 똑같을 수 없다.
1952년에 나온 약 70년 전 소설인데도 '금지된 일기장'이 그리는 갈등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발레리아의 어머니와 발레리아, 딸과 며느리로 이어지는 여성 세대 간 반목. 어머니의 헌신을 당연시하고 적극적으로 요구하면서 이기적인 '요즘 젊은 여자들'을 향한 불만을 터트리는 발레리아의 아들. 이런 대립의 한가운데서 "되고 싶었던 존재와 현실과 타협한 실제 모습과의 간극"을 마주하는 발레리아의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고민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