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제국교회와 반나치 '고백교회'의 충돌

입력
2025.01.0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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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나치 시대의 교회- 1


나치 독일의 복음주의 기독교 민족주의자 루트비히 뮐러(Ludwig Mueller)가 1932년 8월 ‘제국교회(ReichsKirche)’ 수장 격인 국가 주교에 임명됐다. 제국교회는 신성로마제국 시절부터 이어진 독일의 여러 개신교파를 하나로 묶어 전체주의 이념에 복무하게끔 나치가 만든 어용 교회로 게르만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 구약 성경 배제, 세속 권력에 대한 존중을 표방했다. 제국교회는 유대인(혈통) 목사를 축출하고 신도를 배제하며 기존 교회 및 종교단체를 압박했다.

33년 9월 반(反)제국교회파 개신교 목사들은 ‘목회자 비상연맹’을 설립해 제국교회에 대항했다. 연맹 회원 6,000여 명은 이듬해 1월 8일 베를린 거리에서 이례적인 성직자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나치 국가 주교(뮐러)의 종교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며 교회를 나치화-아리안화하려는 일체의 조치에 불응하겠다고 선언했다. 마르틴 루서 종교개혁 이후 이어져온 가톨릭과 개신교(루서교) 간 종교전쟁과 갈등을 봉합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와 ‘30년 전쟁’ 평화 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1648)’을 저항의 종교적 근거로 내세웠다.

시위자들은 이후 스위스 신학자 겸 목사 칼 바르트와 훗날 나치 수용소에서 처형당한 디트리히 본회퍼 등이 주도한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로 결집, 34년 5월 ‘바르멘 신학 선언’을 통해 교회 및 신자가 복종할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재확인하고 나치가 승인한 제국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나치가 집권한 33년 당시 독일의 유대교 신자는 국민(약 3,700만 명)의 1%에도 못 미쳤고 나머지는 대부분 기독교인(개신교 2/3, 가톨릭 1/3)이었다. 히틀러는 종교적 분란으로 인한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자신이 임명한 뮐러를 해임했다. 뮐러는 45년 종전 직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계속)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