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로 해외 취업하려뎐 '시인 윤지양'의 귀환… "시인과 개발자, 공통점 있죠"

입력
2024.12.31 16:58
22면
제4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 윤지양 인터뷰
응모하고 삭제해 버린 작품으로 문학상 수상
"시집 '기대 없는 토요일', 타인의 존재 들어가"

하마터면 '시인' 윤지양을 한동안 잃을 뻔했다. 제4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인 윤 시인은 문학상에 작품을 제출했을 당시 원본 파일을 모두 지워 버렸다. 26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윤 시인은 "내 안의 무언가를 내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개발자로서 해외 취업을 준비하던 그에게 수상 소식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더라면 윤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자 2024년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기대 없는 토요일’은 그대로 세상에서 사라질 운명이었다. 시인으로서의 그도 마찬가지다.

201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으로 등단해 2021년 첫 시집 ‘스키드’를 발표한 윤 시인은 코딩 교육 프로그램인 ‘부트캠프’를 거쳐 개발자로 일했다. 생계를 위해 선택한 직업이었다. 윤 시인은 “시인과 개발자는 언어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며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이 써야 하는 코드도 어떻게 보면 시와 비슷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시집 ‘기대 없는 토요일’에서 눈에 띄는 작품인 ‘Nguyễn Thế Hoàng’과 'Let’s work hard!'는 윤 시인이 개발자로 있을 당시 “베트남 외주 개발자와 소통할 때 업무 외 잡담을 하는 순간이 시 같다는 생각”에서부터 착안했다.

이처럼 시집에는 ‘인간’ 윤지양의 일상을 시로 확장한 작품이 여럿이다. 일본 라면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다뤘던 결제 단말기(포스기)의 화면과 “주방은 전쟁터야”라며 주방에서 숙주를 삶던 사장님의 말은 ‘후지라멘왕’이라는 시가 됐다. “허겁지겁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는 순간을 텍스트로 써서 시라고 우기는 것”이라는 윤 시인의 말은 그의 ‘비시각각 프로젝트’를 떠올리게 한다. 전단지와 광고문, 간판 등 일상에서 접하는 비시(非詩) 텍스트를 통해 ‘시는 무엇인가’를 알아보려 시작한 기획으로 윤 시인은 지금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이를 지속하고 있다.

12월 19일 열린 김수영 문학상 시상식에서 12·3 불법계엄 사태를 언급하며 “쓰기 이전에 삶이 있다”고 밝힌 윤 시인이 그리는 시 속의 삶은 한 사람만의 것은 아니다. 유튜브에서 정치 관련 동영상을 보며 자주 "빨갱이" 소리를 하고, "독재 국가하에서는 국방력이라도 강했다"고 말하는 P나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 등은 개인의 일상을 통해 사회와 현실을 환기한다. 윤 시인은 “첫 번째 시집은 나와 언어의 대결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나와 세계가 대결하다가 져서 쓴 느낌”이라면서 “타인의 존재가 (시집에) 많이 들어가 있다”고 귀띔했다.

김수영 문학상을 받고 ‘한국에서 할 일이 더 있구나’라고 생각했다는 윤 시인은 “당분간 한국에 있으면서 시를 많이 써보려고 한다”고 했다. 신춘문예와 김수영 문학상에 이은 그의 세 번째 등장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윤 시인은 말했다.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둔 시를 쓰는 스타일이었는데 어쩔 때는 뛰어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다음번에는 그렇게 쓸 수도 있겠죠.”

전혼잎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