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평화 헌신’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영면... 향년 100세

입력
2024.12.30 09:00
WP “건강·평화·민주주의 옹호... 눈부신 경력”
퇴임 후 방북, 김일성 만나... 한반도 외교 관여

미국 제39대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현직 시절은 물론 백악관을 떠나서도 줄곧 전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했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100세.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 등 미국 언론들에 따르면 카터재단은 성명을 통해 카터 전 대통령이 이날 오후 3시 45분쯤 조지아주 고향 마을 플레인스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고 밝혔다. WP는 “건강과 평화, 민주주의의 옹호자로서 대통령직 이후 눈부신 경력을 쌓았다”며 카터 전 대통령의 영면 소식을 전했다. 2015년 흑색종(피부암)이 간과 뇌로 전이되는 등 오랜 시간 동안 병마와 싸워 온 그는 2023년 2월 19일 돌연 모든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집에서 가족과 남은 시간을 보내겠다고 발표하며 세상과의 영원한 작별을 준비해 왔다.

격동의 재임기, 정책에 인권운동 반영한 ‘평화 대통령’

1924년 조지아주 농가에서 태어난 카터 전 대통령은 젊은 시절 미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 건 민주당 소속으로 조지아주 상원의원에 당선된 1960년부터다. 1971년 조지아 주지사를 거쳐 5년 뒤 대통령 선거에서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을 제치고 미국의 3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카터 전 대통령 재임기(1977~81년) 미국은 안팎으로 요동쳤다. 전 세계에 휘몰아친 석유 파동의 여파로 미국 내 물가상승률은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실업률 급등,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겹치는 ‘스태그플레이션’ 탓에 카터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진땀을 빼야 했다.

돋보였던 건 인권·외교 분야다. 카터 행정부는 1960년대부터 미국 내 대두된 반(反)인종차별·반전·환경보호운동 등 여러 시민운동의 영향을 받은 정책들에 역점을 뒀다. 주요 외신들은 카터 전 대통령이 임기 중 알래스카 땅 수백만 에이커를 연방 자연보호 구역으로 지정하고,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수의 여성과 비(非)백인을 연방정부 직책에 임명하는 등 선구적 행보가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특히 카터 행정부의 여성 고용 정책은 훗날 ‘여성·진보의 아이콘’으로 불린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전 대법관 등 걸출한 여성 인사들을 발굴하기도 했다.

카터 행정부의 대표적 외교 성과로는 1978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꼽힌다. 이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집트 정부로부터 독립 국가로 인정받았다. 카터 전 대통령의 역할이 컸다. 그는 미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두 나라 수장을 초청해 13일간 회담 동안 중재역을 맡았다. "수십 년간 이어진 중동의 갈등을 풀고 평화를 이끌어냈다"는 긍정적 평가가 쏟아졌다.

그러나 임기 말, 또 다른 외교 문제에 발목을 잡혀 결국 재선에 실패했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당시, 주이란 미국대사관의 직원 66명이 이곳에 난입한 과격파 시위대에 의해 억류된 ‘이란 인질 사태’였다. 카터 정부는 이란과 즉각 단교하며 금융거래·교역 등 통상을 전면 금지하며 맞대응했다.

그럼에도 1년이 지나도록 사태가 해결되지 않은 데다, 급기야 인질 구출 작전을 위해 투입된 미군 8명마저 숨지자 미국 내에선 “더 강경한 조처로 대응해야 했다”는 비난 여론이 치솟았다. 카터 전 대통령 지지율은 폭락했고, 그는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패배했다. 이란은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이듬해 1월 20일에야 미국인 인질들을 풀어줬다.

퇴임 후 외교 특사·빈곤 구호…노벨평화상 수상

낮은 지지율 속에 임기를 끝마쳤지만, 카터 전 대통령은 백악관을 떠난 뒤 오히려 더 큰 존경을 받았다. 퇴임 후 배우자 로절린 카터(95)와 함께 고향 목장으로 돌아가 소박하게 생활하면서도, 재임 시절 활약한 외교 영역과 전 세계 인권 문제 해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1994년 북한 방문이 대표적이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하자 미국은 평안북도 영변의 북한 핵시설을 타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군사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점에 카터 전 대통령은 미국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찾았다. 김일성 당시 북한 국가주석을 직접 만나는 파격적 행보를 보인 그는 1차 북핵 위기를 극적으로 해소시킨 1등 공신이 됐다.

1982년 직접 설립한 비영리기구인 ‘카터 센터’를 중심으로 아이티, 보스니아 등 국제 분쟁 지역에서 평화적 해결책을 물색하기도 했다. AP통신은 “카터 센터는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 전 세계에서 최소 113건의 부정선거를 감시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고 전했다.

전 세계를 돌며 개발도상국 인권·보건 증진에도 힘썼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80년대부터 비영리단체 ‘해비타트 포 휴머니티’와 함께 빈곤층을 위한 집을 지었고, ‘지미 카터 프로젝트’를 통해 자연재해로 집을 잃은 이재민을 도왔다. 암 발병 이후인 2019년에도 테네시주 내슈빌의 집짓기 현장에 나와 못질을 할 정도로 빈곤층의 주거 환경 개선에 헌신했다.

1990년대에 들어선 ‘기생충과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오염된 물을 통해 전파되는 북아프리카의 ‘기니 벌레’ 퇴치를 위해서였다. 카터 전 대통령은 "나는 마지막 기니 벌레보다 오래 살 것"이라고 공언했고, 감염 사례는 실제로 1986년 350만 건에서 2021년 14건으로 급감했다.

그리고 2002년, 카터 전 대통령은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다. 세계 인권과 민주주의 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인권탄압 중지’ 박정희 정부 압박, 북한 방문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군사정권의 인권 탄압을 문제 삼아 주한미군 철수 카드를 내밀며 박정희 정부에 압박을 가한 것이 시작이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94년 방북해 핵 개발 동결을 약속받은 이후로도 한반도 외교에 깊게 관여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북한 국가주석 간의 남북 정상회담도 주선했지만, 1994년 7월 김 주석이 사망해 회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최근까지도 미국 특사로 방북해 북핵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메시지를 꾸준히 피력해 왔다. 2017년 박한식 조지아대 명예교수와의 좌담에서 그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만나 북미 평화협정 체결과 북한의 핵 동결을 협의해 한반도의 평화체제에 기여할 것”이라며 “한반도에서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1994년 방북 경험을 활용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말년까지 정치 현안 목소리·시민 운동가

카터 전 대통령은 건강 악화로 최근 들어선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인권과 미국 정치 현안에 대해서는 꾸준히 목소리를 내 왔다. 2021년 1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사태에 대해 "미국의 민주주의를 우려한다"는 성명을 2년 연속 냈고, 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에 건강상 이유로 불참했지만 따로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지난해 알래스카의 자연보호구역을 관통하는 도로 개통에 반대하는 성명을 낸 것이 카터 전 대통령의 마지막 공식 활동이다. 해당 성명에서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제 이름은 지미 카터입니다. 나는 평생 동안 농부, 해군 장교, 주일학교 교사, 야외 활동가, 민주주의 운동가, 건축업자, 조지아 주지사,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나는 미국의 39대 대통령으로서 봉사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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