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은 당연히 여름 여행지로 인식된다. 연중 10도 안팎의 기온이 유지되니 한여름 폭염을 피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반대로 한겨울에는 상대적으로 따뜻하다. 바깥에 칼바람이 불어도 내부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딴 세상이다. 삼척 환선굴은 국내 개방 동굴 중 규모가 가장 커 이른바 ‘지하 궁전’으로 불린다.
환선굴은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험한 산악에 위치한다. 이른바 삼척 대이리 동굴지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관광객에 개방된 환선굴과 대금굴 외에도 해발 400~1,000m 사이 산기슭에 관음굴, 사다리바위바람굴, 양터목세굴, 덕밭세굴, 큰재세굴 등 여러 동굴이 분포한다. 대이리라는 지명은 뾰죽한 봉우리가 귀처럼 생겨서 얻은 지명이다.
주차장에 도착하면 하늘 높이 솟은 여러 봉우리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덕항산(1,071m)이다. 옛날 농경지 한 자락이 아쉬운 산골 주민들이 ‘가파른 산을 넘으면 화전을 일구기 좋은 땅이 있어 덕을 볼 수 있다’고 해 덕메기산으로 불렀다.
마을 입구에 한정된 자원으로 삶터를 꾸린 산골 주민들의 흔적인 너와집과 굴피집이 남아 있다. 나뭇조각으로 지붕을 마감한 모양이 비슷해 보이는데 재료가 다르다. 너와집은 기와나 이엉 대신 질 좋은 소나무로 만든 판자를 지붕에 얹은 집이다. 너와 위엔 골바람에도 날아가지 않게 통나무와 무거운 돌을 얹었다. 건조한 날에는 틈새로 연기를 내보내고 습한 날에는 나무판자가 팽창해 비를 막아 주는, 산간 마을 화전민의 지혜가 담긴 구조다.
굴피집은 지붕에 나무판자 대신 두꺼운 참나무 껍질을 차곡차곡 깔아 이은 집이다. 여러 종류의 참나무 중에서도 코르크 층이 두꺼운 굴참나무 껍질을 사용한다. 물과 기체가 잘 스며들지 않아 보온과 방수에 효과적인 재료다.
물레방아와 통방아도 남아 있다. 시소의 원리를 이용하는 통방아는 물의 양과 낙차 조건이 까다롭지 않아 물레방아를 설치하기 어려운 곳에 효과적이다. 방아 찧는 속도가 3분에 7회 정도로 느려 하루 종일 보리 3말 정도를 도정할 수 있다고 한다. 농지가 멀리 분산된 산골에서 일을 나갈 때 곡식을 돌확에 넣었다가 돌아와서 꺼내거나 추가로 빻을 수 있는 일종의 무인 도정기다. 한겨울로 접어든 지금 계곡 물소리는 여전히 청아한데, 통방아로 연결되는 수로에는 얼음이 꽁꽁 얼어 있다.
통방아에서 조금 올라가면 환선굴로 가는 모노레일 정류장이다. 굴은 덕항산 중턱 해발 500m에 위치한다. 동굴 입구까지 별도의 탐방로가 있지만 워낙 험해 대부분 모노레일을 이용한다. 2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모노레일은 출발하자마자 가파른 경사를 오른다. 동굴 입구까지 느릿느릿 7분이 걸린다.
동굴은 입구부터 규모가 다르다. 동굴에 들어갈 때 기본적으로 헬멧 착용이 의무지만 환선굴에선 이 과정이 생략된다. 입구 폭이 무려 16m, 높이 12m에 달한다. 내부는 더욱 넓어 폭 20~100m, 높이 20~30m 규모다. 허리를 굽힐 필요가 없고, 조금만 주의하면 돌에 머리를 부딪힐 일도 없다. 이만하면 동굴 탐험이 아니라 산책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동굴의 총길이는 6.2km, 그중 1.6km 구간에 탐방로가 놓여 있다. 1시간가량 걸린다.
어두컴컴한 동굴 안은 또 다른 자연이자 차원이 다른 세상이다. 물방울이 떨어지고, 폭포가 쏟아지고, 계곡이 흐른다. 탐방로를 걷다 보면 계단뿐만 아니라 출렁다리와 철재 교량도 건넌다. 기이한 형상의 바위를 신비롭게 비추는 은은한 조명과 함께 군데군데 장식 조명이 설치된 커다란 지하 궁전이다.
수억 년 자연이 빚은 조각품엔 갖가지 이름을 붙였다. 미녀상, 만물상, 사자상, 꿈의 궁전, 도깨비방망이, 논두렁, 악마의 발톱, 버섯폭포, 옥좌대… 이루 헤아리기 힘들다. 1662년 삼척부사 허목이 쓴 ‘척주지’에도 기록된 것으로 보아 환선굴에 사람이 발길을 들인 지 오래인데, 지하 세계의 신비를 제대로 표현하기에 인간의 상상력이 한없이 초라하다.
아쉬움도 있다. 환선굴은 1997년 일반에 개방됐고 2010년 모노레일이 설치돼 관광이 한결 편리해졌는데 그만큼 본 모습이 훼손된 것도 사실이다. 개방 전에도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으니, 커다란 종유석이 잘려나간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도굴꾼이 잘라간 기암이 어디로 흩어졌는지 알 길이 없지만, 굴을 나서는 순간 억겁의 신비도 햇살에 산산이 부서졌을 게 자명하다.
환선굴과 대금굴은 대이리 군립공원 안에 위치한다. 대금굴은 모노레일로만 갈 수 있다. 공원 입장료 포함 1만2,000원. 환선굴은 공원 입장료(4,500원)와 모노레일 이용료(왕복 7,000원)가 별도다. 웅장함을 느끼고 싶다면 환선굴, 동굴 안에서 오래 걷는 게 부담스러우면 대금굴을 추천한다.
환선굴과 가까운 곳에 활기치유의숲이 있다. 차가운 겨울 속까지 따스하게 데울 수 있는 힐링다도(1만2,000원), 족욕테라피(1만 원), 온열테라피(1만 원) 등을 운영한다. 마침 지명도 ‘활기리’이니 숲 산책으로 지친 몸과 마음에 활력을 채울 수 있는 곳이다.
요즘 삼척은 새 철도 개통을 앞두고 살짝 들떠 있다. 동해중부선 삼척~포항(166.3㎞) 구간이 31일 개통식을 열고 내년 1월 1일부터 정식 운행할 예정이다. 우선 시속 150km의 ITX-마음이 운행된다. 1년 후 시속 260km의 KTX-이음이 투입되면 강릉에서 부산 부전역(363.8km)까지 3시간 이내, 삼척에서 포항까지 100분이 걸릴 예정이다.
새로 들어선 삼척역에서 도로를 건너면 삼척번개시장이 있다. 매일 오전 4, 5시부터 대략 11시까지 그날그날 삼척항에서 나는 수산물을 판매하는 시장이다. 싱싱한 물건을 비교적 싼 가격에 구입하고, 새벽 시장의 활기도 덤으로 담아갈 수 있다.
시내 구간 삼척 바다를 즐기고 싶다면 증산해변에서 삼척항까지 이어지는 새천년해안도로 드라이브를 추천한다. 수로부인으로 시작해 이사부로 마무리되는 길이다.
동해시와 경계인 증산해변 남쪽 모퉁이에 ‘해가사의 터’가 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헌화가’와 ‘해가사’는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다 발생한 일화를 소재로 한다. 삼척시는 해가사의 터로 추정하는 증산마을 바닷가에 작은 공원을 만들었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 남의 아내를 빼앗은 죄 얼마나 크더냐 / 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해가사를 새긴 조형물 뒤로 아담한 해변이 펼쳐진다.
증산해변에서 낮은 언덕을 넘으면 삼척해변이다. 군더더기 없는 약 1km 모래사장 앞으로 펼쳐지는 겨울 바다가 시리고 푸르다. 삼척해변에서 삼척항까지 해안도로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힐 정도로 바다 조망이 빼어난 길이다. 약 4km 구간 곳곳에서 차를 대고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2000년에 개설한 새천년해안도로는 ‘이사부길’로도 불린다. 이사부는 신라 지증왕 13년(512) 가야와 우산국을 정벌하고, 진흥왕 11년(550)에는 고구려의 도살성(현 천안시 혹은 증평군으로 추정)과 백제의 금현성(현 세종시로 추정)을 빼앗아 신라의 영토를 크게 넓힌 장군이다.
도로가 끝나는 곳 이사부광장에 방파제 위로 덱 산책로를 설치해 놓았다. 광장 안쪽 언덕에는 옛 어촌마을 정서가 층층이 쌓인 나릿골 감성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인근에 ‘이사부독도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오늘날 독도와 동해 영유권의 근거를 마련한 이사부 장군의 영웅적 면모와 독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2가지 미디어아트를 선보인다. 독도와 관련된 서적을 모아 놓은 작은 도서관 겸 쉼터도 있다. 입장료 6,000원 중 4,000원은 지역 상품권으로 되돌려준다.
삼척의 상징적 건축물 죽서루도 함께 볼 만하다. 정면에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현판이 함께 걸려있다. 관동팔경은 모두 바닷가에 위치하는데 죽서루만 오십천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주변 풍광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얘기다. 건물은 9개의 기둥을 자연 암반에 세워 18개 기둥 길이가 모두 다른데도 웅장하고 균형미가 빼어나다. 고려 때 이승휴, 이곡, 안축, 정추, 김구용 등과 조선시대 숙종과 정조, 하륜, 심언광, 이이, 정철, 허목 등 당대 명인의 시문 200수가 남아 있는 명실공히 삼척의 명소다.
삼척도호부 관아가 자리 잡은 일대는 성안 마을, 즉 성내동이다.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쇠락해가던 주변 상가는 도시재생사업으로 조금씩 새살이 돋고 있다. 인근에 강원대 삼척캠퍼스가 있어 ‘대학로’라 불리는 골목에 오래된 식당과 공방 등이 밀집해 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성내동성당도 방문해보길 권한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그것과 꼭 닮은 예수상이 마을을 굽어보며 팔을 펼치고 있다. 짙은 연두색의 성당 건물도 단아하고 품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