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은 퇴진하라!"
21일 오후 3시 서울 경복궁 동십자각 인근 집회 현장. 서울 마포구에 사는 이지은(27)씨는 태극기가 그려진 대형 담요를 어깨에 두른 채 영하권 한파를 견디며 목청을 높였다. 20대 여성 두 명은 각자 집에서 가져온 국경일 게양용 태극기(5호, 가로 180㎝·세로 120㎝)를 흔들었다. 태극 문양을 덧댄 선글라스를 착용하거나 태극 리본 머리띠 등 각양각색 '태극기' 아이템을 착용한 20, 30대 여성들도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12·3 불법계엄'을 한목소리로 규탄하며 대통령 파면을 외쳤다.
윤 대통령 탄핵심판 집회 현장에서 젊은 층의 '태극기 되찾기' 열풍이 확산하고 있다. 극우 성향의 강성 지지자를 '태극기 부대'라고 부르는 것에서 보듯 사실 태극기는 오랜 기간 보수 진영 집회의 전유물이었다.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반대 집회 때처럼 윤 대통령을 지키자는 보수 시민단체들의 최근 집회에서도 어김없이 태극기가 나부낀다. 그러나 이 태극기를 이제는 '모든 국민의 것으로 돌려 놓자'는 공감대가 '2030세대' 사이에서 퍼지는 양상이다. 이지은씨는 "국기에 좌우가 어딨어요. 태극기를 이젠 되찾아야죠"라고 힘줘 말했다. 무대 음악에 맞춰 게양용 태극기를 흔들던 두 여성도 "다시 좋은 의미의 국기로 되돌리려고 들고 나왔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집회에 나오는 특정 단체 회원이 아닌 묵묵히 일하던 직장인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느닷없는 반헌법적 비상계엄 선포 직후 자신에게 닥칠 뻔한 위기 상황을 크게 염려해 집회에 나왔다는 설명이다. 출판사 직원인 이씨는 "계엄 선포로 내 직장이 먼저 타격을 입을까봐 걱정이 컸다"고 했다. 계엄 선포 뒤 공개된 포고령에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는 대목이 특히 섬뜩했다고 한다. 한 손에는 응원봉을, 다른 손에는 태극기를 쥔 2030의 행진은 쭉 이어졌다.
태극기를 들었다는 청년들의 인증글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모(26)씨는 지난 14일 주말 집회 참가 뒤 소셜미디어 엑스(X·옛 트위터) 계정에 '태극기 인증샷'을 찍어 올리며 "자기 정체성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게 재밌기도 하다"고 말했다. 건곤감리(태극기의 네 괘)가 검은색이 아닌 무지갯빛으로 칠해진 화려한 태극기 목격담도 화제가 되고 있다.
태극기 무료 나눔도 열기를 더한다. '부산 2030 여성 애국자 모임'을 꾸린 김윤희(31)씨는 깃발과 깃대를 일일이 직접 끼운 태극기 150개를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김씨는 "남녀노소 태극기를 받은 뒤 흔들어줘 뿌듯하다"고 했다. 엑스에선 '나눔할 태극기 100개를 조립 중'이라는 또 다른 이의 인증글도 공유됐다.
장경섭 서울대 사회학과 석좌교수는 "내란으로 망가진 국가를 2030 자신들이 바로잡아야 한다는 인식이 이어져 국가 상징물인 '태극기'도 되찾자는 논의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라며 "내란 사태가 민주주의 시민의식을 일깨운 측면이 있다"고 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