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헤어의 집에 묵던 한 무연고 노인이 1827년 11월 방값 약 4파운드가 밀린 채 수종(水腫)으로 숨졌다. 헤어는 손해를 벌충하기 위해 노인의 시신을 지역 사설 해부학교실을 운영하던 의사 로버트 녹스(Robert Knox)에게 팔기로 결심, 북아일랜드 동향인 하숙생 버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7파운드 10실링을 벌어 헤어가 4파운드 5실링을, 버크가 3파운드 5실링을 챙겼다.
그렇게 둘은 부활자들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무덤을 파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연고 없는 투숙객이 자연사하는 ‘행운’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본격적인 살인 행각에 나섰다. 주요 범행 대상은 투숙객이었지만, 만만한 사람을 골라 집으로 초대한 뒤 술을 먹여 잠든 틈에 목을 조르는 등 최대한 범죄 정황이 드러나지 않는 방법을 썼다. 제임스 윌슨이라는 걸인 청년도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장애로 다리를 절며 거리에서 구걸하던 청년은 하지만 꽤 알려진 인물이었고, 녹스의 해부학교실 학생 중 일부가 그의 시신이란 사실을 알아봤다고 한다. 의사 녹스는 해부 전 시신의 머리와 다리를 잘라 신원을 숨겼다.
그들의 엽기적인 살인-사체 매각 범죄는 수익금 분배를 둘러싼 둘의 다툼과 배신, 한 시민의 신고로 들통이 났다. 1828년 크리스마스 당일, 판사는 버크에게 교수형과 함께 “버크의 시신을 공개 해부한 뒤 그의 유골을 보존-전시해 후세에 경각심을 일깨우라”는 이례적인 형을 선고했다. 그의 유골은 지금도 에든버러 외과의사협회에 보관돼 있다. 수사 및 재판에 협력한 헤어는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고, 녹스 역시 학회에서 제명만 당했을 뿐 법적 처벌은 면했다.
영국은 1832년 해부학법을 제정, 일반인의 의학 연구용 시신 기증을 최초로 허용하고 의사와 해부학 강사 및 의대생에게 교도소와 노역장 죄수의 시체까지 해부할 수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