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성폭행하려는 남성의 혀를 물어 잘랐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해야 했던 최말자(78)씨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재심 필요성이 인정된다는 판단을 내놨다. 사건 발생일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객관적 물증 확보가 어렵긴 하지만, 당사자의 일관된 진술을 뒷받침하는 여러 정황이 있다면 실체적 진실을 다시 따져 볼 수 있다는 취지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최씨가 제기한 재심 기각 결정에 대한 재항고심에서 재심을 기각한 원심을 깨고 18일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원심에서 최씨의 진술 신빙성을 깨뜨릴 충분하고도 납득할 만한 반대 증거나 사정이 존재하는지에 관한 사실조사를 했어야 한다"고 밝혔다.
최씨는 열여덟 살이던 1964년 5월 6일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 노모씨(당시 21세)의 혀를 절단한 혐의(중상해죄)로 기소돼 이듬해 법원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마을에서 마주친 노씨가 별안간 최씨를 넘어뜨린 뒤 입을 맞추려고 시도해, 이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노씨 혀를 깨물어 1.5㎝가량이 잘려 나갔다.
최씨는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당시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처녀의 순결성을 방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젊은 청년을 일생 불구로 만들었고, 남자로 하여금 키스하려는 충돌을 일으키게 한 데 대한 도의적 책임도 있다"는 이유였다. 반면 노씨는 강간미수를 제외한 특수주거침입·특수협박 혐의로만 기소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최씨 사건은 법원행정처가 법원 100년사를 정리하며 1995년 발간한 '법원사'에 실리는 등 '잘못된 판결의 대표 사례'로 지목됐다. 최씨는 2018년 촉발된 '미투 운동'에서 용기를 얻어 여성단체 도움으로 2020년 5월 부산지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과거 검찰 조사 과정에서 불법구금, 자백 강요, 협박 등의 피해를 입었다고도 폭로했다.
1·2심 법원은 그러나 최씨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심은 유죄 선고를 뒤집을 만한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됐을 때 가능한데 최씨 사례는 그렇지 않다고 본 것이다. "법 적용 오류 탓에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재심은 그런 사유로 여는 게 아니다"라고 기각했다.
하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이미 60년의 세월이 흘러 '불법수사 의혹'에 관여된 이들에 대한 공소시효가 완성돼 법원 판결로는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을 감안했다. 최씨 진술이 충분히 합리적이고 그에 부합하는 다른 직·간접 증거들이 여럿 있다면, 객관적 물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별다른 사실조사 없이 최씨의 청구를 기각하는 건 부당하다고 봤다.
대법원은 "최씨의 일관된 진술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일련의 사정들이 제시된 반면, 이에 모순되는 다른 객관적 증거는 없다"며 "최씨가 검찰에 처음 소환된 1964년 7월부터 구속영장이 발부돼 집행된 것으로 보이는 1964년 9월까지 불법으로 체포·감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