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19일 양곡관리법을 비롯해 6개 쟁점 법안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 가결 이후 첫 거부권 사례다. 야당은 즉각 반발했지만 당초 고언한 것과 달리 한 권한대행을 탄핵하겠다고 달려들지는 않았다. 12·3 불법계엄 사태 이후 국정 수습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다만 김건희 여사 특별검사법과 내란 특검법이 남았다. 이달 31일까지 거부권 행사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한 권한대행이 이들 법안에도 거부권으로 맞선다면 '레드라인'을 넘는 일이다. 최종 선택을 앞둔 한 권한대행을 상대로 야당은 압박수위를 높이고 있다.
한 권한대행은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임시 국무회의에서 농업4법(양곡관리법·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농어업재해대책법·농어업재해보험법)과 국회법, 국회증언감정법 등 6개 법안에 대한 재의요구안을 의결하고는 바로 재가했다. 이로써 한 권한대행은 2004년 '거창 양민 학살사건 보상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한 고건 당시 권한대행에 이어 두 번째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한 권한대행과 정부는 이날 결정에 앞서 많은 고민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불법계엄과 대통령 직무정지 후에도 거부권을 행사하는 건 '민심에 역행한다'는 지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 권한대행은 "정부와 여야 간 협치가 절실한 상황에서 재의를 요구하게 돼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방기선 국무조정실장도 취재진에 "언론에서 '거부권' 표현이 많았는데, 오늘은 정말 국가 미래를 위해 '다시 의논'(재의)을 해달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한 권한대행은 거부권 행사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쌀과 주요 농산물의 최저가격을 보장하는 양곡관리법과 농수산물 가격안정법은 시장을 왜곡하고 정부의 재정부담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농어업재해대책법과 농어업재해보험법은 각각 재해지원과 보험의 기본 원칙에 반한다는 점과 형평성 문제를 지적했다. 국회법은 예산집행을 지연시키고, 국회증언감정법은 헌법 원칙에 위배되며 기업의 핵심 기술·영업비밀 유출 가능성이 우려된다고 강조했다. 한 권한대행은 "헌법 정신과 국가의 미래를 최우선으로 하는 책임 있는 결정"이라고 덧붙였다.
더불어민주당은 한 권한대행의 거부권 행사에 "명백한 입법권 침해"라며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조승래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한 권한대행은 내란 공범, 내란 대행으로 남으려는 것이냐"고 비판했다. 다만 그는 탄핵을 직접 언급하는 대신 △내란 상설특검 후보 추천 의뢰 △김 여사 특검법, 내란(일반)특검법의 조속한 공포 △헌법재판관 임명 협조 등을 촉구했다. 양곡법 거부권 행사 때문에 한 권한대행을 밀어내지는 않겠지만, 남아 있는 특검법 시행이나 헌법재판관 임명은 포기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두 특검법은 이달 31일까지 거부권 행사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정부는 "헌법과 법률에 부합하는지를 마지막 순간까지 따져보겠다"며 여전히 신중하다. 이날 결정처럼 한 권한대행이 기존의 원칙과 신조에 비중을 둔다면 추가 거부권 행사로 정국이 소용돌이칠 수도 있다. 김 여사 특검법의 경우, 한 권한대행이 총리 시절 수차례 거부권을 건의하며 '위헌성'을 지적해온 법안이다.
총리실 고위관계자는 "대통령 권한대행의 권한 범위라는 건 없다"며 "다만 정치적 의미로 해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는 적극적인 행사가 적절치 않아 자제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쟁점들에 대해 '권한의 한계'는 없지만, 정치적 논의 과정을 주시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 관계자는 헌법재판관 임명에 대해서도 "여러 법률적 의견, 정치적 이유도 있기 때문에 심사숙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