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2년 동안 일자리 수를 10% 줄였고, 노동시간을 15% 해방시켰습니다."
"우리가 제출한 정책을 추진했다면 일자리 수가 15%, 노동시간이 20% 줄었을 겁니다."
앞다퉈 일자리 수 줄이기 경쟁에 나선 정치인이라니. 가이 스탠딩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대(SOAS) 교수는 신간 '시간 불평등'에서 이 같은 정치인들을 상상해 보자고 제안한다. 18세기 이후 좌·우파를 막론하고 '완전 고용'을 정책 목표로 내달리는 정부에 반기를 든다.
완전 고용을 달성하기 위해 정부는 △까다롭지 않고 △지루하고 △임금이 형편없는 전일제 노동으로 사람들을 밀어넣었다. 노동자 계급의 시간은 오롯이 노동에 바쳐졌다. 반면 자본가 계급의 시간은 돌봄, 여가, 정치로 흘러갔다. 정부의 완전 고용을 위한 노력은 노동자와 자본가 계급의 시간 불평등을 심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생계를 위해 노동에 사용되는 시간이 많을수록 사람들은 그들이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의 시간이 부족해진다. 책의 원제 '시간의 정치(The Politics of Time)'를 곱씹게 된다.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지지만 시간은 평등하지 않다. 특히 시간 부족은 참정권을 제한한다. 선거 때마다 '먹고사느라 바빠서 투표할 시간이 없었다' '바빠서 누가 나왔는지는 잘 모르고 매번 찍는 당 찍었다'는 시간 불평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저자는 시간의 불평등이 계급에 따라 정치에 참여할 입지를 좁히고 민주주의 기반을 약화시킨다고 지적한다. "시간 불평등이 모든 불평등 가운데 가장 최악이다"라고 일갈한다.
노동과 일은 엄격히 다르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인들은 '노동(labour)'을 "가난이라는 조건에서 수행되는 고통스럽고 힘든 활동"으로 정의했다. 반면 '일(work)'은 "돌봄, 공부, 교육, 창조적 작업 등 사회 구조와 공동체 유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활동"을 의미했다. 책은 다수의 시간이 노동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소수만이 시간의 자유를 누리며 일을 하는 특권을 누리게 됐는지 역사적으로 규명한다.
'노동의 존엄성'도 자본가들이 주입한 허위의식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기, 자본가가 일하기 싫어 하는 노동자를 일터에 더 오래 묶어두기 위해 만든 논리라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고용안정 보장법을 앞서서 추진하며 노동자를 위한 입법으로 포장했다. 당시 좌파가 노동을 거부하는 대신 정당한 분배와 보편적 복지를 요구하는 데 그치면서 노동은 고착화했다. 책은 "임금 노동을 일과 생활의 정상적인 방식으로 보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노동에 따른 시간 불평등 해소 방안으로 '기본소득'을 내세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대선 때 같은 논리로 기본소득 공약을 내세우기도 했다. 저자는 공공 근로와 같이 노동을 전제로 한 복지 정책이 아닌 "모두가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시간에 대한 자유를 확보할 수 있도록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이 지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선 저서( '공유지의 약탈' '불로소득 자본주의' '기본소득')에서 언급한 대로 토지가치세와 탄소배출부담금 등으로 재원을 마련하자는 구체적인 조달 방안도 제시한다.
"100년 후 혹은 2030년이 되면 사람들이 주당 평균 15시간만 일하게 될 것이다."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0년 논문 '우리 손자들의 경제적 가능성'에서 예언했다. 6년 후 주당 평균 15시간은 실현될 수 있을까. 앞서 저자가 밝힌 대로 정치에 달렸다. 정치인들이 (기본소득을 동반한) 일자리 수 감소, 노동시간 단축 등의 정책을 추진한다면 계급에 따른 시간 불평등은 줄어들 수 있다. 정치가 다수의 시간을 중요시한다면 사람들이 노동이 아니라 여가와 돌봄, 정치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친히 국내 상황도 콕 집어 지적했다. "적절한 시간의 정치가 부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기묘한 징후는, 필요할 경우 사람들이 주당 120시간씩 일하는 게 허용돼야 한다고 말하는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면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