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에게 "난방 틀어 달라"했다가… 외출한 커플은 돌아오지 못했다

입력
2024.12.20 04:30
16면
<92> 1997년 미국 뉴욕 맨해튼 커플 실종 사건
집주인과 임대료 갈등 빚던 세입자 갑자기 실종
1991년 실종된 인물과도 갈등 빚었던 집주인
늑장 경찰 수사... 별다른 증거 찾지 못해 난항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1997년 그해 미국 뉴욕 맨해튼의 초겨울 추위는 유독 매서웠다. 마이클 설리번(당시 54세)과 캠던 실비아(당시 36세)는 맨해튼 남쪽 끝 5층짜리 아파트 맨 위층에서 동거 중인 커플이었다. 이들은 금요일이었던 11월 7일 오후 4시(현지시간) 비디오 대여점에서 영화 '애딕티드 러브' 테이프를 빌린 뒤 집으로 돌아왔다. 커플은 테이프와 영수증을 현관에 둔 채 여느 때처럼 하노버스퀘어 인근에서 조깅을 하기 위해 러닝화를 신고 나가는 게 마지막으로 목격됐다. 그리고 커플은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예술적인 삶 꿈꾸며 뉴욕 갔지만…


커플이 금요일 오후 달리기를 하러 나간 뒤 주말 동안 소식이 없자 주변 사람들은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11월 11일 실비아가 일하는 부동산중개소 동료가 매사추세츠주(州)에 있는 실비아의 엄마와 친척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비아는 고등학생 때까지 매사추세츠의 작은 마을 하이애니스포트에 살았다.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도시 생활을 꿈꾼 그녀는 197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뉴욕으로 떠났다.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하던 실비아는 18세 연상이자 배우인 설리번을 만나 함께 살았다.

전화를 받고 이틀 뒤 실비아의 엄마 로리 실비아가 맨해튼 집을 둘러봤다. 지갑, 여분의 열쇠, 여권, 비디오 모두 현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러닝화 두 켤레만 없어졌다. 실비아의 엄마는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

하지만 수사 당국은 미적댔다. 커플의 친구들이 이들의 실종을 알리는 전단지를 게시하고, 신문과 라디오 방송국에 제보를 하자 같은 달 14일부터 수사가 시작됐다. 경찰은 △실종자가 18세 미만이거나 65세 이상에 해당하지 않았고 △정신적 질환이 없었고 △범죄 혐의가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수사를 보류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친구들에게 커플이 훌쩍 여행을 떠날 가능성은 없는지 물었다. 설리번은 미국 횡단 시도를 한 적이 있고 카니발 행사를 즐기기 위해 텍사스주까지 간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이들이 즉흥적으로 휴가를 떠날 리가 없다고 진술했다. 평소 워낙 성실하고 체계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갑자기 사라질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었다.

"난방 틀어 달라" 요청 편지 보낸 뒤 실종

수사를 시작한 경찰은 커플이 집주인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쿠바 태생의 자물쇠 업자인 로버트 로드리게스는 1993년 20만5,000달러에 이 아파트 건물을 사들인 뒤 1층에서 자물쇠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경찰은 커플의 오랜 이웃인 척 델라니의 진술을 확보했다. 커플이 사라진 11월 7일 오전 실비아는 두 통의 편지를 들고 건물 1층 로드리게스의 자물쇠 가게를 방문했다. 진술에 따르면 커플과 델라니는 "건물 내 난방이 부족하니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임대료 지급을 보류하겠다"는 내용과 "아파트에 온도 조절기를 설치하라"는 내용의 편지에 서명을 해 전달했다. 델라니는 1976년부터 해당 건물에 살았고, 설리번은 그로부터 몇 년 후에 입주했다.

델라니는 1982년부터 10년 넘게 해당 건물의 세입자 대표를 맡아왔다. 그는 뉴욕타임스(NYT)에 "로드리게스는 괜찮은 집주인이었지만 다른 많은 세입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와 매년 난방을 놓고 줄다리기 싸움을 해야만 했다"고 밝혔다. 특히나 커플이 살던 최상층은 천장이 더 높고 바람이 잘 들어오는 탓에 다른 곳보다 유독 추웠다.

여기에 당시 인근 집값이 급등한 상황도 겹쳤다. NYT에 따르면 이전까지는 아파트 주변의 부동산 가치가 낮았으나 그해 1월 인근 대형 사무실이 고급 아파트로 개조되면서 집값이 폭등했다. 델라니의 아내는 NYT에 "로드리게스가 최근 새로 들어온 세입자들이 있는 곳의 창문을 바꿨다"며 "아마 그들에게 임대료를 올린다고 말했을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당시 로드리게스는 해당 건물 임대료로 매달 약 1,500달러를 벌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로드리게스와 커플 간 임대료 갈등이 사건의 동기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수사 협조 위해 외출" 후 사라진 용의자

경찰은 곧바로 로드리게스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경찰은 11월 15일 밤 로드리게스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로드리게스에게 커플이 살던 건물 지하를 비롯한 아파트 내부를 수색할 수 있는지 물었고, 그는 이를 수락했다. 하지만 수색은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경찰은 하루 뒤 로드리게스의 집을 직접 방문했다. 로드리게스는 맨해튼 아파트에서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인근에 해리먼 주립공원, 구스폰드산 주립공원 등 많은 공원과 숲이 있는 지역이었다. 경찰이 로드리게스의 거주지를 찾았을 당시 그는 그곳에 없었다. 가족들은 "로드리게스가 11월 15일 토요일 자정 이후 '경찰 수사 협조를 위해 맨해튼으로 간다'고 말한 뒤 집을 나갔다"고 밝혔다. 문제는 경찰이 11월 16일 오후까지 로드리게스를 부른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경찰은 커플의 아파트와 로드리게스의 자택을 비롯해 뉴욕 곳곳을 수색했다. 헬기와 수색구조견도 동원했다. 아파트 건물 1층 자물쇠 가게의 바닥도 뜯어냈다. 하지만 역시나 커플과 관련된 증거를 찾지 못했다.

11월 19일 맨해튼 지방검찰 측은 "로드리게스에게 영장을 신청할 만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용의자, 1991년 실종 인물과도 갈등

로드리게스는 사라진 지 10여 일 만에 자물쇠 가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경찰은 수사 중 로드리게스가 1991년 실종된 데이비드 킹(당시 31세)과도 문제가 있었다는 점도 확인했다.

킹은 로드리게스와 함께 컴퓨터 소프트웨어 및 프로그램 도난 혐의를 받은 인물이다. 둘은 경쟁사의 사업 기록 등 약탈을 공모한 혐의로 약 1,300만 달러 규모 소송에 공동 피고로 올라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 킹과 로드리게스가 서로 갈등을 빚던 중 킹이 1991년 7월 11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실종됐다.

경찰은 로드리게스의 총기 보관함이 사라졌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그러나 로드리게스는 끝까지 보관함의 위치를 알리지 않았다. "총기를 다 팔았다"고만 답했다. 총기를 판 시점에 대해서도 진술하지 않았다.

수사당국은 설리번 실비아 커플과 킹의 실종과 관련한 확실한 정보를 찾아내지 못했다. 사건은 다시금 미궁에 빠져들었다.

살인 아닌 다른 범죄로 6년형

이후 로드리게스는 실종 사건과 무관한 △탈세 △절도 △사기 등의 혐의로 1999년 징역 6년형에 처해졌다. 죽은 사람의 신원을 이용해 사기를 저질렀던 것이다. 이 무렵 로드리게스는 이혼을 했고 거주했던 집도 팔았다. 2002년 로드리게스는 가석방을 신청했으나 맨해튼 지방검찰은 반대했다. 이후 2004년 가석방되면서 감옥에서 풀려났다.

NYT는 설리번 실비아 커플이 실종된 지 10여 년이 지난 2012년 실비아의 엄마 로리를 다시 찾았다. 커플 실종 사건과 관련해 로드리게스는 물론 아무도 기소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로리는 여전히 희망을 붙잡고 있었다고 신문은 전했다. 로리는 NYT에 "실종과 관련된 뉴스를 볼 때마다 '또 한 명이 더 사라졌구나'라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지금도 나는 매일 실비아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2017년 뉴욕 현지 매체 픽스11에는 이렇게 전했다. "실비아가 사라진 후 매년 11월 7일이면 가족들과 함께 실비아의 실종을 기립니다. 하지만 실비아가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늘 뉴욕 허드슨강 물가에 가서 꽃을 꽂곤 하죠."


손성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