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사진 찍듯 왕의 특별한 순간을 남겼다"... 조선 왕실의 기념사진

입력
2024.12.1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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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중기록화' 펴낸 박정혜 교수
궁중기록화 연구 30여 년 집대성
"조선의 무궁무진한 이야기 담겨"

"조선시대 궁중기록화에는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있어요. 대신 오래, 찬찬히 보아야 들리죠. 수십 년 본 그림에서도 어느 날 문득 세부 장면을 발견합니다."

조선시대 기록화 권위자 박정혜(63)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궁중기록화에 담긴 이야기를 묶은 책 '조선시대 궁중기록화, 옛 그림에 담긴 조선 왕실의 특별한 순간들'을 최근 펴냈다. 무려 880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서양화를 전공한 박 교수는 30여 년 전 대학원에서 연구 주제를 찾다가 총천연색으로 그려진 궁중채색화에 매료됐다. 당시 산수화와 수묵화 위주의 한국 미술 연구에서 궁중기록화는 연구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궁중화는 왕이 뜻깊은 일을 기억하기 위해서 남긴 시각 기록이에요. 마치 사진을 찍듯 사람 하나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묘사했죠. 그림이 워낙 치밀하고 내용이 풍부해서 보는 재미가 있어요. 짝사랑하듯이 그 재미에 빠져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한 거죠(웃음)."


조선의 왕은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

책은 한평생 그가 연구해온 궁중기록화를 집대성한 결과다. 원고지 3,500매 분량에 도판만 600여 장이다. 궁중기록화의 연대기부터 제작 동기와 준비 과정, 제작의 명분 등을 샅샅이 다뤘다. 박 교수는 궁중기록화의 가장 큰 특징으로 '사실적 재현'을 꼽았다. 사진이 없던 시절 기록화는 왕의 업적을 남길 유일한 시각 매체였다. 그림은 왕이 남기고 싶은 순간을 세밀하게 표현했다.

궁중기록화의 상당수는 왕의 공식 행차를 포함해 왕이 예우받는 기로소(耆老所·조선시대에 연로한 고위 관료의 친목 ·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 입소 순간, 종친들에게 베푼 연회, 신하들과 즐기는 진연 등이다.

"기록화는 기념화라고 불러도 됩니다. 기념물에는 본질적으로 후대에 전승되길 바라는 욕망이 담겨있어요. 왕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후대를 위해 남겨둔 그림이라는 뜻이죠."

특히 박 교수가 궁중기록화의 백미로 꼽는 '준천계첩'은 영조가 자신의 주요 업적으로 꼽은 준천(개천정비사업) 과정을 그렸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숙원사업이던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영조는 이 사업을 기록화첩으로 제작해 후대에 남겼다.

'월리를 찾아라' 조선 왕실판

궁중기록화의 또 다른 특징은 '보수적인 화풍'이다. 당대 손꼽히는 화원들이 제작에 참여했으나 전통적인 화법의 틀을 지켰다. 기본적으로 당대 건축, 복식, 음식 등 사회문화적 사실에 충실해 인물과 상황을 묘사했다. 다만 왕실의 권위를 강조하거나, 신분 계급을 보여주는 등 조선왕조의 세계관도 드러난다. 궁중기록화에는 행사의 주인공인 왕을 직접 묘사하지 않는다. 왕이나 귀족 등 주인공을 중심에 두고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서양화와는 사뭇 다르다. 박 교수는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시대를 초월해서 이어지는 독특한 장치와 문법을 터득할 수 있다"며 "중국이나 일본의 궁중기록화와는 차별되는 한국 고유의 묘법을 규명하는 것이 후속 과제다"라고 말했다.

책에 수록된 궁중기록화는 마치 영국의 베스트셀러 '월리를 찾아라'의 조선시대 버전을 연상시킨다. 그림을 읽는 묘미를 묻자 박 교수는 "비슷한 그림 같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깃거리가 무한하다는 점이 매력적"이라며 "구석구석 자리해 넌지시 말을 건네는 듯한 정보를 뜯어보고 고증하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답했다.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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