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내전이 발발한다면... 트럼프 시대 앞두고 나온 ‘시빌 워’

입력
2024.12.17 14:30
22면
근미래 연방군과 서부군 싸우는 미국 상상
진영 다툼, 혐오·차별이 만들어낼 디스토피아
'품질보증' A24 영화... 백악관 진격 장면 눈길

미국에서 내전이 발발한다. 캘리포니아주와 텍사스주가 연합한 서부군이 미 연방군에 맞선다. 일상은 무너진다. 식료품을 구하기 어렵고 수시로 정전되며 자동차 주유는 쉽지 않다. 대통령은 연방군의 우세를 강조하나 전세는 서부군으로 기운다.

연방군과 ‘서부군’이 맞선 미국

서부군이 워싱턴 D.C로 진군하고 있을 때 베테랑 종군기자 리(커스틴 던스트)와 조엘(와그너 모라)은 백악관으로 향한다. 내전을 유발한 대통령 인터뷰를 위해서다. 1,400km가 넘는 취재 여정에 노장 기자 새미(스티븐 매킨리 헨더슨)와 기자 지망생 제시(케일리 스패니)가 함께 한다. 리 일행은 전장의 면모를 면밀히 취재한다는 성취감, 죽음의 위기를 벗어날 때의 쾌감,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는 각별한 동료애 등을 취재 여정에서 느낀다. 무엇보다 컴퓨터게임처럼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공포감에 짓눌린다.

‘시빌 워: 분열의 시대’는 시사적이다. 도널드 트럼프를 닮은 대통령의 외모(트럼프보다는 젊다)부터 눈길을 끈다. 영화는 대통령의 실정 또는 권모술수로 미국이 두 쪽 났음을 암시한다. 거리에서는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하고, 무장한 민간인들이 이웃을 무자비하게 다룬다. 억제할 수 없는 분노, 진영 의식에서 비롯된 편견, 인간의 잠재적 폭력성 등은 내전을 계기로 분출된다.

기자들과 함께 내전 한복판으로

관객은 리와 조엘 등과 더불어 내전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리와 조엘, 새미, 제시는 각각 다른 성별과 연령대를 대변한다. 관객은 이들 중 누군가에게 자신을 대입하며 영화를 보게 될 듯하다. 종군기자들은 어디에서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알 수 없는 최전선에 서 있으나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그들은 언론이라는 이유로 군인이나 민병대원 등 뒤에서 총알을 피하며 전쟁의 실재를 기록해 간다.

하지만 종군기자라고 혼돈의 상황을 피해갈 수 없다. 리와 조엘 등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맞는다. 서부군인지 연방군인지 알 수 없는 군인으로부터다. 군인은 그들에게 묻는다. “어느 쪽 미국인?”이냐고. 자신과 다른 이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폭력적인 ‘분열의 시대’가 그대로 담긴 질문이다. 객관을 담보로 취재에 나서는 기자들조차 어느 한쪽 편을 들어야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백악관 진격 장면 긴장과 공포 최대치

서부군의 백악관 진격 장면이 압권이다. 군인들이 백악관 경호원들과 벌이는 전투는 긴장과 공포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충격적인 결말은 오래도록 여운을 줄 듯하다.

제작비는 5,000만 달러(약 717억 원)로 추정된다. 미국 영화사 A24가 배급한 영화 중 가장 높은 제작비다. ‘문나이트’(2016)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앤 원스’(2022) 등을 투자 배급한 A24는 국내 영화팬들 사이에서도 품질보증마크로 통하는 곳이다. ‘시빌 워’는 지난 4월 미국에서 개봉했고, 전 세계에서 1억2,618만 달러(약 1,811억 원)를 벌어들였다. A24 영화 중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앤 원스’(1억4,341만 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익이다. '엑스 마키나'(2014)와 '멘'(2022)을 연출한 알렉스 가랜드 감독 신작이다. 3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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