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한덕수 당시 총리가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에게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건의하면서 지적한 말이다. 시장경제 원리를 해치기 때문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이에 양곡법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거부권 행사 1호 법안'의 오명을 썼다. 이후 윤 대통령은 총 25차례 거부권을 행사하며 국회 입법권에 맞섰다.
양곡법이 부메랑이 돼 다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을 겨눈다. 본회의에서 양곡법과 국회법 등 6개 법안을 처리한 이후 윤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면서 한 권한대행의 선택에 달렸다. 국민의힘은 이미 거부권 행사를 건의한 상태이지만 그대로 따랐다가는 한 권한대행의 거취마저 불투명하다. 야당이 그의 탄핵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 권한대행이 일관성을 유지할지, 아니면 탄핵정국의 바뀐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대처할지를 놓고 곤혹스러운 처지로 몰렸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16일 "심사숙고 중"이라고 전했다. 한 권한대행이 거부권 행사 여부에 대해 아직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농업 4법(양곡관리법·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농어업재해대책법·농어업재해보험법)과 국회법·국회증언감정법 등 6개 법안은 지난달 28일 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이달 6일 정부로 이송됐다. 이후 15일이 지난 21이 데드라인이다. 이때까지 법률을 선포할지, 거부권을 행사해 국회로 돌려보낼지 결정해야 한다. 앞서 노무현 정부에서 고건 당시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한 전례가 있다.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한 법안은 양곡법과 국회법이다. 양곡법은 정부가 남는 쌀을 의무 매입하고 쌀값이 공정가격 미만으로 떨어지면 생산자에게 차액을 지급하는 '양곡가격안정제' 도입이 골자다. 정부와 여당은 막대한 재정 부담을 우려한다. 국회법의 경우 정부의 내년도 예산안이 법정기한 내 심사를 마치지 못해도 본회의에 자동부의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예산심사 지연 우려가 있다"며 거부권을 건의했다.
17일 국무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도 거론됐지만, 일단은 상정을 보류하기로 했다. 복잡한 정국 상황을 고려한 결정으로 읽힌다. 불법계엄 이후 한 권한대행은 내란 피의자로 지목된 상태다. 과거 대통령 권한대행에 비해 운신의 폭이 훨씬 좁다. 민주당은 "의회 권력이 행사한 입법권에 대해 국민의 선택을 받지 않은 단순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가, 이것이 (탄핵의) 바로미터"(박성준 원내수석부대표·16일 MBC 라디오)라며 '한 대행 탄핵 재검토' 카드를 내세워 압박했다. 다만 이재명 대표는 "일단 탄핵은 없다"고 선을 그은 상태다.
한 권한대행은 결정을 서두르는 대신 기한인 21일 이전까지 충분히 숙고할 방침이다. 기한 전이라면 언제든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안건을 처리할 수 있다. 정부 관계자는 "시한을 20일까지라고 생각하고 모든 걸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한 대행은 10일 국회를 통과한 '김건희 여사 특별검사법'과 '내란특검법'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앞서 6개 법안에 비해 정치적으로 한층 첨예한 법안들이다. 거부했다가는 야당의 파상 공세를 피할 수 없다. 이에 한 권한대행이 주고받기식으로 6개 법안은 거부하고 2개 특검법은 수용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총리실 관계자는 "남은 기간 국회와 소통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권한대행은 우선 국정수습에 주력했다. 경제분야를 시작으로 대통령실 참모들의 업무보고가 시작됐다. 박춘섭 대통령실 경제수석과 신중범 경제금융비서관이 보고자로 나섰다. 총리실 관계자는 "사회, 과학기술, 저출산 등 다른 수석실도 이번 주에 순차적으로 업무보고를 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한 대행은 '제10회 중견기업의날 기념식'에 참석해 "우리 경제가 직면한 도전은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하지만 반드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