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나, '착한 아이 증후군'일까요

입력
2024.12.2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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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열의 회복]

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5년째 상가 건축 시공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30대 남성입니다. 상대에게 싫은 소리를 하기보다 내가 손해 보는 게 결국 이득이라고 생각하고 둥글둥글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요즘 까다로운 고객을 상대하면서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의심하는 순간이 잦아졌습니다.

다양한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 특성상 많게는 70명 가까이 되는 사람과 동시다발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늘 친절하게 전화 응대를 하려고 애쓰는데 일 관련 전화만 하루 30통 넘게 받을 때도 있다 보니 벨소리가 울리면 심장이 빨리 뛰고 초조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벨소리로 설정을 잘 안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후배의 지원 요청을 거절 못 해 후배와 함께 맡게 된 현장에서 고객을 상대하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거절을 못 한 것을 후회하는 중입니다. 제 일정이 바빠 맡기 곤란한 상황이었지만 거절은 제게 참 어려운 일입니다. 고객이 까다롭다 보니 현장 실무자들이 털어놓는 고충을 들어줘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객 불만 사항을 수습하려 몸으로 더 뛰다 보니 체력적으로도 많이 지칩니다.

군 복무 시절 좋은 사람과 싫은 사람을 적어 제출하는 인기투표 비슷한 걸 한 적이 있는데 싫은 사람으로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사람이 저였습니다. 여전히 '친절한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감정을 솔직하게 표출했다가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요즘 받는 스트레스는 거절을 못 해 후회하게 된 경우여서, 부정적 감정을 표현할 줄은 알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큽니다. 전반적으로 친절하고 둥글둥글한 사람일지라도 어쩌다 한 번쯤은 거절하고, 차갑고 냉정하게 상대를 대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런 게 아예 안 되는 게 아쉽습니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도 사서 읽었는데 큰 도움은 되지 못했습니다. 가끔씩은 저도 단호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참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생각하는데 왜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열 살 이상 터울인 누나가 두 명 있습니다. 누나들이 일찌감치 대학 진학과 동시에 본가를 떠나다 보니 평생 누나들과 함께한 시간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늦둥이인 덕분에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싫어하고 못되게 구는 경험을 아직 못 해 본 탓에 미움받을 용기가 없나 싶기도 합니다.

인생의 경로를 잡는 30대에 들어서면서 요즘 참 많은 생각이 듭니다. 직업의 안정성이나 결혼 계획 등을 주변 친구들과 자주 비교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 바람은 비교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족과 관계가 좋지만 가족이나 여자 친구에게는 고객을 대할 때만큼 살가운 편은 아닙니다. 이런 게 '착한 아이 증후군'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상대에게 늘 맞춰 주기만 하면 제 감정이 언젠가 엉뚱한 순간에 크게 폭발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부정적 의견을 제시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어떤 명확한 선을 가질 수는 없을까요.

임성철(가명·30·회사원)

성철씨, 회사 생활 경력이 쌓이고 타인과 부딪히는 경험을 진지하게 하기 시작하는 시기를 맞아 고민이 많은 듯 보입니다. 하지만 자기 정체성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기인 30대 초반에 무척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그만큼 성철씨 자신에게 집중할 좋은 기회로 보입니다. 부정적 의견을 제시하는 게 어렵고 감정 표현의 명확한 선을 갖고 싶다고 했는데, 결국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가치관의 어떤 우선순위를 가진 사람인지 자신을 확실히 이해할 때 그 명확한 선도 생기는 겁니다. 비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는 희망도 마찬가지죠. 비교란 자신의 주관이 없을 때 많이 하게 됩니다. 나에 대해 잘 알아보고, 내가 가진 가치관의 근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시기인 듯합니다.

거절을 못 하는 성철씨의 성격은 우선 가족관계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형제자매와 갈등을 빚고 실랑이를 하고 싸우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기주장을 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성철씨는 화목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지만 누나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했습니다. 늦둥이로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하나 반면 갈등을 많이 경험하지 못하고 자기주장하는 연습이 제한적인 환경이었을 겁니다.

갈등 없는 환경에서 자란 성철씨는 지금처럼 갈등이 생겼을 때 자기주장을 하면 비난을 받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이 커질 수 있죠. 늦둥이 막내로 사랑받고 자랐겠지만 터울이 많은 형제는 부모 역할까지 하는 경우가 많아 대등한 관계라기보다 의존적 관계가 되기 쉽습니다. 주변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게 보호해 주고, 보호받는 데 익숙해지는 의존성이 커지게 되는 것이죠. 타인에게 결정을 맡기고 이를 따르는 데 익숙해지는 것인데, 가족 안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또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도 초반에는 좋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만 어느 정도의 한계점이 찾아오면 본인이 걱정하는 대로 자기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터질 것 같은 불안감도 커지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성철씨가 살아온 과정을 되돌아볼 때 진짜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집중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왜 자기주장이나 거절을 어려워하는지, 미움받을 때의 두려움이 왜 이렇게 큰지 자기 경험을 통해 이해해 보는 게 중요한 시작입니다.

‘좋은 사람’의 정의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거절을 안 하는 게 좋은 사람일까요? 인간관계에서 거절은 곧 사이가 멀어지는 것, 관계가 끝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진솔하게 자기표현을 하면서 거절하는 부분이 생기고, 그로 인해 약간의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이 진솔한 관계를 형성하고 상호 존중하며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거절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인식할 게 아니라 거절을 통해 일이나 관계가 긍정적이 될 수도 있음을 인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을 불편하지 않게 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요? 인간관계는 상호적이기에, 이는 곧 남한테 한쪽으로 치우쳐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겠죠. 누구에게나 인내심의 한계가 있어, 언젠가 감정이 역치를 넘어 폭발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자신을 지키면서도 타인에 대해 배려심을 갖는 게 지속 가능한 진짜 좋은 사람이겠죠.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무시하지 말고 스스로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게 중요한 인식 변화의 계기가 될 겁니다.

인식 전환과 동시에 이전과 다른 행동을 반복적으로 해서 익숙하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거절도 그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사소한 것부터 거절하는 연습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가령 친구와 약속을 잡을 때 시간, 장소를 상대에게 너무 맞춰 주기보다 내가 편한 쪽으로 주장해 보는 겁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첫발이 될 수 있습니다.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실수로 메뉴가 잘못 나오면 그냥 잘못 나온 메뉴를 받아들이고 넘어간 경우가 있지 않나요. 이런 경우 다시 해 달라고 부탁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안 하던 거절을 하다 보면 지나치게 밋밋하게 거절해 상대에게 끌려가거나 또는 너무 정색해서 분위기가 이상해질 수 있습니다. 부드럽게 거절하는 표현 방법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거절만 하지 말고 제안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먼저 표현한 뒤 거절하는 겁니다. 또는 대안도 함께 제시해 보며 자꾸 연습해 보는 게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성철씨의 인생 전체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남을 지나치게 배려해 균형이 안 맞던 인생에서, 나를 배려하고 균형을 맞추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삼기를 조언합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내 우선순위는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차근차근 성철씨 본인의 마음을 살펴보세요. 사실 지금 정도의 고민 시기를 인식하지 못한 채 넘어서서 꽤 시간이 지난 뒤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을 겪고 나서야 깨닫는 경우도 많습니다. 현재 수준에서 문제의식을 가진 게 무척 다행스럽기도 하고 긍정적입니다.

인생 주기에서 초기 성인기라 할 수 있는 20~30대에는 사춘기 때 자기 가치관과 정체성이 형성되지 못해 이 시기에 들어서야 진짜 고민을 하게 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전까지 익숙한 대로 수동적으로 살다가 이제서야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것이죠. 이상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고 소중한 과정입니다.

성철씨는 반사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나한테 뭘 원하는가를 우선시했을 겁니다. 초점을 나에게로 옮길 때 진정한 의미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성철씨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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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김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