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기 일주일 전쯤, 어떤 책에 대해 쓸지를 묻는 한국일보 기자의 메시지를 받는다. 이번에는 책 선정에 작은 해프닝이 있어서 원고에서 이를 언급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나누었다. 예정된 송고일은 지난주 수요일인 4일이었고, 기고일 전날 밤에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을 TV에서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다. 아침이 돼서야 겨우 잠들었다 깨어나서 글을 마무리하려고 컴퓨터를 켰다가 깨달았다. 내게서 문학에 대해 발화할 수 있는 언어가 사라졌다는 것을.
계속해서 속보를 찾아보다 기자에게 연락했다.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에 대해 쓰겠다고. 그러나 책을 바꾸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다행히 상황이 상황인지라 게재 일정이 한 주 밀리게 되었고, 그사이 약간 회복한 나는 다행히 이 글을 쓰고 있다.
10일에는 노벨문학상 시상식이 있었고, 소설가 한강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소년이 온다’를 이 코너에서 쓸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너무 많이 다뤄진 소설이고, 이제는 더 많이 알려졌기에 굳이 내가 다루지 않아도 될 책이라고. 이 책은 이제 대부분의 사람이 알듯이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항쟁을 다룬 이야기다. 소설은 장별로 화자가 바뀌며 진행된다. 소설 속 화자들은 모두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지만, 그날을 겪은 사람들에게 1980년 5월 18일은 모두 오늘이다.
“요즘 작가들은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나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는 “거시적인 역사의 흐름만이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바로 역사”라고 대답했다. 지금도 그것이 아주 틀린 대답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12월 3일의 밤을 지나고 나니, 사적 언어는 공적 언어에 의해 아주 쉽게 소멸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학의 언어가 법률의 언어에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문학을 통해 아주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일상의 영위라는 축복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지난밤, 우리는 과거에 의해 도움받았다. 죽은 자가 우리를 살렸다. 우리에게 끝나지 않는 1980년 5월 18일이라는 오늘은, 이 오늘을 살게 된 사람들은, 이제 모두 사유하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따르고 저버려야 하는 것을, 실행하지 않는다는 실행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사유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도 늘 오늘만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문학의 언어는 바로 오늘을 살아갈 것이고, 언제든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발화할 것이다. 오늘이 어제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