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이혼 후 초등학생 자녀를 홀로 키우고 있는 40대 A씨는 늘 걱정이 많습니다. 혹시라도 자신이 다치거나 아프게 되면 아이를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A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보험설계사를 통해 거금의 사망보험도 들었습니다. 보험금 수익자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어머니, 즉 아이의 외할머니로 설정했죠.
얼마 전 A씨는 건강검진 과정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컴퓨터단층촬영(CT)상 이상한 점이 보여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폐암 진단을 받은 것입니다. 심지어 암이 꽤 진행된 상태라 "최악의 경우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던 A씨에게 당장 떠오른 건 자녀를 위한 사망보험금 5억 원이었습니다. 아직 성인이 되려면 한참 먼 아이에게 보장해줄 수 있는 건 든든한 경제력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또 다른 걱정이 듭니다. A씨의 어머니가 보험금을 수령해 아이를 키워야 할 텐데, 70대인 어머니에게 아이의 다음 10년, 20년을 책임지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신다면 A씨의 사망보험금은 A씨의 형제에게 상속되는데, 그 돈이 오롯이 아이만을 위해 쓰일지는 알 수가 없었죠. A씨가 가장 원하는 건 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 모자람 없이 원하는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되었을 때 어느 정도의 목돈을 손에 쥘 수 있도록 하는 거였거든요.
보험사와의 상담 끝에 A씨가 찾아낸 답은 '보험금청구권 신탁'이었습니다. A씨는 신탁계약서를 몹시 꼼꼼하게 작성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망보험금이 발생하면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매월 300만 원씩 자녀의 외할머니 계좌로 송금한다. 용도는 교육비와 생활비로 제한한다. 자녀의 학원비 등은 어머니로부터 영수증을 매월 제출받아 확인한다. 자녀가 성년이 되면 남은 보험금의 절반을 자녀 계좌로 송금하고, 이후 25세가 되면 나머지를 모두 송금한다.'
지난달 12일부터 국내에서 정식으로 허용된 보험금청구권 신탁은 사망보험금을 바로 모두 지급하는 게 아니라 사전 계약에 따라 신탁사가 보관·운용·관리해주는 상품입니다. 현재 3,000만 원 이상 일반사망 보장에 한정해 직계 존비속 및 배우자를 수익자로 지정 가능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초고령사회에 적합한 일종의 '복지 금융'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요, 금융위원회는 보험금청구권 신탁 허용 소식을 알리며 "재산 관리의 경험이나 능력이 부족한 미성년자·장애인 등 유가족 복지 향상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보험금을 포함해 다양한 재산을 상속하는 과정에서 '신탁'이 적극적으로 활용됩니다. 실제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신탁 수탁고는 일본 267%, 미국이 121%를 기록했는데요, 우리나라는 이 수치가 57%에 불과했습니다. 이유는 신탁재산 인정 범위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험연구원에 따르면 미국은 사망보험청구권뿐 아니라 상해·질병보험금까지 신탁재산으로 인정할 정도로 신탁 범위가 광범위합니다. 일본도 보험금청구권 신탁뿐 아니라 △후견제도지원 신탁 △교육자금증여 신탁 △결혼·육아지원 신탁 등 사회복지 관련 신탁 범위를 적극적으로 확대해왔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 정부는 그간 퇴직연금과 부동산, 채권 등에 대한 신탁만 허용했습니다. 신탁 제도의 인기가 없었던 이유죠. 2010년부터 금융당국에 보험금청구권 신탁 도입 필요성을 건의해온 박성철 미래에셋생명 본부장은 "대부분의 국민은 신탁이 고액 자산가를 위한 서비스이며 복잡하고 비싼 서비스라고 오해하고 있다"고 귀띔했습니다.
이제 얘기가 달라졌습니다. 상속 재산 규모가 커졌고, 초고령화 진행으로 치매 등의 위험성이 높아졌죠. 신탁 자산에 사망보험금이 포함되면서 어렵게만 여겨지던 신탁에 대한 문턱도 상당히 낮춰졌습니다. 신탁 상품에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 은행은 물론, 장기적 자산운용에 자신감을 가진 생명보험사들까지 경쟁적으로 관련 상품을 내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특히 종신보험 인기가 시들해진 생명보험 시장에 보험금청구권 신탁 제도는 새로운 '먹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시장 규모만 900조 원에 달한다고 추정됩니다. 일단 신탁 상품을 팔려면 종합재산신탁업 자격이 있어야 하는데, 국내 보험사 중 이를 취득한 곳은 삼성·한화·교보·흥국·미래에셋생명 등 5곳입니다. 도입을 검토 중인 한화생명을 제외한 나머지 네 곳은 지난달부터 적극적으로 보험금청구권 신탁 상품을 판매 중입니다. 은행 중에서는 KB국민·하나·우리은행이 관련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삼성생명은 지난달 보험금청구권 신탁 상품 출시 직후 5일간 총 156건(755억 원)의 신탁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습니다. 가장 많이 가입한 구간은 3억 원 미만(62%)이었는데요, 자녀의 대학 졸업이나 결혼 등 의미 있는 시점에 고인을 기억할 수 있도록 일시금으로 지급해달라는 식의 신탁 내용이 많았다고 합니다. 상품 출시 2주 만에 100호 계약을 돌파했다고 밝힌 교보생명 분석에 따르면 계약자 57%는 여성이었으며 연령별로는 50대(34%)와 40대(32%)가 가장 많았습니다. 지급방식은 자녀 양육비·교육비 월 분할지급이 54%로 가장 많았다고 하네요.
보험금청구권 신탁은 계약자마다 내용이 천차만별입니다.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 구체적으로 조건을 설계하기 때문입니다.
직장인 이모(47)씨는 지적장애를 가진 20대 초반 자녀의 경제적 지원을 위해 6억5,000만 원 규모의 사망보험금청구권 신탁을 체결했는데요. 만약 자신이 사망한다면 보험금 수령일에 5,000만 원을 일시 지급하고 익월부터 10년간 300만 원, 이후 매월 250만 원을 지급하도록 했습니다. 최소 18년은 아이를 지켜줄 수 있도록요.
조부모가 손주를 위해 보험금청구권 신탁에 가입하기도 합니다. 자영업자 최모(66)씨는 손주 3명(8·10·12세)의 대학 학비를 지원해주기 위해 보험사를 찾았습니다. 3억 원 규모의 사망보험을 들었는데요, 각 손자녀가 성년이 될 때 1억 원씩 지급하도록 신탁 내용을 설계했습니다. 손자 결혼 시 축하금으로 지급하기 위해 5,000만 원 규모 보험금청구권 신탁에 가입한 김모(69)씨는 혹시나 손자가 결혼을 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특약으로 '미혼 시 40세 도래 시점에 일시금을 지급한다'는 내용도 걸었다고 하네요.
이제 첫발을 뗀 만큼 앞으로 미국·일본처럼 신탁 허용 범위를 늘려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강성호 보험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올해 7월 보고서에서 "베이비부머가 후기고령자(75세 이상)로 진입하는 시점부터는 고령층의 신탁에 대한 수요가 다양화될 것으로 예상되므로, 사망보험뿐 아니라 상해·질병보험에 대해서도 보험금청구권의 신탁 범위를 확대하고 나아가 치매 노인 및 고령층에 대한 종합재산관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신탁 제도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박성철 본부장은 "현재 배우자와 직계존비속으로 한정돼 있는 신탁계약 수익자를 형제자매 및 동거인, 공익단체 등으로 유연하게 지정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고, 미국·일본처럼 세제혜택 부여 등 매력적인 유인을 만들어야 한다"며 "보험금청구권 신탁제도는 결과적으로 수익자 재산 보호는 물론 고액 사망보험금을 노린 범죄 예방 효과까지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