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반(反)독점법 위반 혐의 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9일(현지시간) 알려졌다.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대(對)중국 수출 금지 대상 품목에 고대역폭메모리(HBM) 등을 추가하는 내용의 통제 강화 조치를 발표한 지 일주일 만이다. 도널드 트럼프 차기 행정부를 겨냥한 경고 메시지로 해석된다.
이날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중국 국가시장규제국은 엔비디아의 이스라엘 반도체 기업 멜라녹스 인수에 문제가 없는지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엔비디아는 2020년 멜라녹스를 69억 달러(약 9조8,000억 원)에 사들였는데, 당시 중국 당국은 합병 후에도 중국 고객사를 차별하지 말라는 내용을 포함한 조건들을 달아 인수를 허가했다. 당시 엔비디아에 부과된 조건은 7개로 알려졌는데, 이 가운데 일부를 엔비디아가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당국은 보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반독점법은 위반 시 매출의 최대 10%를 벌금으로 부과할 수 있다. 엔비디아의 최근 1년간 중국 매출은 약 135억 달러(약 19조2,600억 원)다.
이번 중국의 조사 착수는 엔비디아의 인수 계약 체결 시점을 기준으로 4년여가 지나 이뤄졌다. 더구나 엔비디아의 멜라녹스 인수는 중국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다. WSJ는 "엔비디아가 구체적으로 뭘 잘못했는지, 조건부 승인이 이뤄진 지 상당 기간이 지난 시점에 왜 문제가 된 건지에 대해서는 당국의 설명이 없는 상황"이라고 짚었다.
이 때문에 테크업계에서는 중국의 이번 조치가 다분히 의도적이면서도 전략적이라는 분석이 많다. 지난 2일 바이든 행정부가 대중국 수출 통제를 강화하자 엔비디아를 볼모 삼아 '맞불'을 놓았다는 것이다.
많은 미국 기업 중에서도 엔비디아를 표적 삼은 것은 충격파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세계 인공지능(AI) 칩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한 엔비디아는 현시점 미국에서 두 번째로 비싼 기업이자,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업체다. 미국의 대중국 첨단 칩 수출 통제 조치로 엔비디아의 전체 매출에서 중국의 비중이 작아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12%에 이른다. 이 때문에 엔비디아는 미국의 수출 규제에 맞춰 중국용 제품을 따로 만들어 판매할 정도로 중국 시장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엔비디아의 관계가 파탄 날 경우 중국은 더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AI 칩 확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하면 중국의 반독점 조사는 실제로 위반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보다는 트럼프 2기 행정부를 향한 경고에 가깝다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바이든 행정부에 바로 반격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공언해 온 대로 중국산 제품에 최대 60%의 관세를 부과할 경우 곧바로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취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는 것이다. 컨설팅회사 유라시아그룹의 이안 브레머 대표는 "차기 미국 행정부와의 큰 협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둔 조치"라며 "그러나 트럼프 팀이 이에 응할지는 현재로서는 확실치 않다"고 WSJ에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