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했다. 정규 프로그램이 느닷없이 중단되고 대통령이 상기된 표정으로 나타났을 때만 해도, 아닌 밤중이라 더 듣기 거북했던 원색적 표현들로 ‘반국가 세력 척결’ 의지를 토해낼 때만 해도 설마했다. ‘독재의 유물’ 비상계엄이 2024년 대한민국에 선포된 믿기 힘든 현실을 두고 사람들은 “딥페이크인 줄 알았다”고 했다. 차라리 딥페이크였다면 이렇게까지 참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마설마하는 사이 대통령은 국민적 트라우마를 헤집으며 온 나라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설마했었다. 대통령이 실체도 불분명한 ‘반국가 세력’을 입에 담을 때마다, 국방은 물론 외교∙안보 라인에 군 출신이 전면 배치된 지난여름에도, 경호처장이 수방사령관, 특전사령관, 방첩사령관을 불러 계엄을 모의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을 때도. 지금 돌이켜보면 모든 과정이 계엄령을 위한 ‘빌드업’이었을 테지만, 당시엔 설마했었다. 대통령실은 제기된 의혹에 대해 ‘괴담’ ‘가짜뉴스’ 운운하며 펄쩍 뛰었지만, 결국 설마했던 계엄령 선포는 현실이 됐다.
설마는 ‘그럴 리 없다’는 부정적 추측과 함께 일말의 기대를 내포한다. 적어도 어떤 기준, 선은 넘지 않을 거라는 마지막 희망 말이다. 대선후보 시절 손바닥에 적힌 ‘王(임금 왕)’자를 두고 온갖 설이 나돌았지만, 그래도 설마설마했던 건 그가 선을 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 후 역술인의 관저 이전 개입 의혹, 영부인을 둘러싼 각종 의혹이 대통령 부부의 공천개입 의혹으로 번지는 상황에도 국민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 설마…” 하지만 의혹은 점점 사실에 근접해 가고 있다.
대통령이 극우 확증 편향에 갇혀 있다는 우려는 “에이, 설마…” 하며 덮고 싶을 정도로 민망한 의혹이었다. 그런데 그 우려가 비상계엄 선포 과정에서 현실로 드러났다. 대통령 담화문 내용을 보면 적대적이고 편향된 표현 일색이다. 대한민국을 ‘마약 천국’,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로 지칭하고 자신에게 반하는 정치 세력을 ‘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이라며 반드시 척결하겠다니. 그뿐 아니다. 야당의 잇단 탄핵과 예산안 삭감을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사회질서가 극도로 혼란한 상황으로 판단했다는 점, 복귀하지 않는 의료인은 ‘처단’하겠다는 포고령은 그 자체로 대통령이 객관적 상황 인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방증한다.
설마는 때론, 무한 신뢰처럼 보이기도 한다. 상대가 기대를 저버려도 다른 희망을 부여잡는 ‘미련’과도 같다. 대통령을 향한 설마라는 미련은 위헌적 비상계엄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대통령은 계엄을 해제하면서 국민에게 사과하기는커녕 또다시 국회를 압박했다. 실망스러웠으나 대통령 본인이 직접 국민에게 소상히 설명해야 한다는 여당 대표의 말에 기다려보기도 했다. “그래, 설마…” 그러나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 본인도, 계엄을 건의한 국방장관도 아무 잘못 없다는 뻔뻔한 입장만 확인했다.
대통령과 그 가족을 둘러싼 숱한 의혹에도, 온 국민을 두려움에 떨게 한 계엄 오판에도 설마설마하며 기다려 준 국민들에게 대통령이 남긴 건 배신감뿐이다. 스스로 선을 넘은 대통령에게 일말의 기대를 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설마…” 하는 미련을 이제는 거둘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