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 2, 3번만 하면 단 몇 초 만에 원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불법 성착취물을 만들어주는 세상. 딥페이크(인공지능이 만든 합성 이미지) 기술이 뒤틀린 성 인식과 맞물려 열어젖힌 새로운 지옥도다. 그 피해는 사진을 도용당한 이들만 보는 게 아니다. 끔찍한 상황을 지켜보며 공포에 질린 여성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입을 닫고 사진을 내리며 존재를 숨긴다. 결국 오랜 투쟁 끝에 좁혀왔던 남성과의 격차가 다시 벌어지게 된다. 인구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여성이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는 건강하게 발전하기 어렵다. 딥페이크 범죄가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의 문제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특히, 피해자의 36.9%가 10대라는 점이 끔찍함을 더한다.
우리 아이들을 디지털 성범죄의 늪에서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무너진 교실 : 딥페이크 그 후'를 연재해온 한국일보 특별취재팀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더디지만 확실한 방법은 문화와 교육을 바꿔야 한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성별 불평등이 깊어지면 젠더 기반 폭력(성별 차이 탓에 발생하는 폭력)도 심해진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일을 부부싸움 정도로 여기는 사회가 가정 폭력 범죄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리 없기 때문이다. 억제 장치가 허술한 곳에서 범죄는 기승을 부리게 된다. 딥페이크 같은 젠더 기반 디지털 성폭력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남성과 여성의 격차 문제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세계경제포럼(WEF)이 2024년 발표한 성(性) 격차 지수를 보면 우리나라는 조사 대상 146개국 중 94위였다. 경제, 군사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 상위권에 있는 한국으로선 다소 어색한 성적표다. 이 지수가 낮다는 건 여성이 남성에 비해 임금이 적고, 국회의원이나 장·차관 등 고위직 비율이 떨어지는 등 남녀 간 기회·배분 격차가 크다는 의미다. 실제 우리나라의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20%(60명·22대 기준)로 세계 184개국 중 바레인, 방글라데시 등과 함께 117위에 머물렀다.
이는 남성을 중심으로 사회가 돌아가는 가부장적 문화의 영향이 크다.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는 중국(106위)과 일본(118위)도 성 격차에서 낮은 순위를 기록했다.
이런 문화 탓에 우리나라의 젠더 기반 성폭력 실태는 매우 심각하다. 미국 사이버보안업체 시큐리티히어로가 전 세계 불법 딥페이크의 등장인물을 분석했더니 한국 국적자 비율은 53%에 달했다.
①결국 여성을 낮춰 보는 문화부터 바꾸고 기회를 나눠야 디지털 성폭력도 멈춰 세울 수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 소속 젠더 전문가인 구로 위크는 본보 인터뷰에서 "경제와 제도 발전에 여성이 기여할 기회를 보장받아야 젠더 기반 폭력이 종식될 것"이라고 말했다.
②문화를 바꾸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아이들부터 공략하는 것이다. 어릴 때 몸에 밴 태도는 평생을 가기에 아직 생각이 열려 있는 시기에 변화를 줘야 한다. 멜리사 알바라도 유엔 여성기구(UN Women) 아시아태평양 지국장은 본보에 보낸 이메일 답변에서 "이성을 존중하거나 평등하게 바라보는 자세는 유년기에 만들어진다"며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바른 인식을 갖도록 해야 딥페이크 등 디지털 성폭력에도 가담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10대를 제대로 교육시키면 개인의 비행을 막는 효과를 넘어 사회 문화 전체를 변화시키는 불씨가 될 수 있다. 남성 성교육 전문가인 이한 남다른성교육연구소 성평등교육전문위원은 "'성인을 가르치는 것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더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며 "직장에서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할 때는 다들 '내가 더 잘 안다'는 표정을 하고 있지만, 아이들은 배우려는 자세가 돼있고 호기심이 강해 생각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쉽다"고 말했다.
다음으로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③전문가들은 타인과 '관계'를 어떻게 가질지에 집중해 교육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성교육 강사인 김민영 자주스쿨 대표는 "지금 10대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거치며 단절과 고립의 시간을 보냈다"며 "이 탓에 친구를 자주 만나며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배울 기회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세계적 교육 흐름도 이 방향으로 가고 있다. 영국은 디지털 성범죄 예방 교육을 할 때 기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대신 온·오프라인에서 타인과 긍정적 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호주 역시 '왜' '어떻게' 상대를 존중해야 하는지 집중적으로 교육한다.
관계가 중심에 있는 성교육. 국내외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추천한 방향이다. 그 대표 사례가 유엔의 교육 기구인 유네스코가 2018년 개정한 '국제 성교육 가이드'의 핵심인 포괄적 성교육이다. 이는 성별에 따른 생물학적 차이나 피임법 등 표피적 지식만 가르치는 방식을 지양한다. 타인과 건강하게 상호작용하는 법이나 성평등 이해, 건강과 복지를 위한 기술 등을 통합적으로 교육하려는 개념이다. 연령에 맞게 학습 목표를 지식·태도·기술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해, 자연스러운 발달 단계별 성장을 돕는다.
'성적 행동 규범과 또래의 영향'을 가르친다고 하자. 포괄적 성교육은 5~8세에게 또래집단 영향력(지식)을 알려주고 그것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음을 인식(태도)하도록 하는 데 목표를 둔다. 동시에 또래가 행사하는 압력에 대응하는 방법(기술)도 익히게 할 수 있다. 아이가 성장해 12~15세가 되면 또래집단이 성적 의사결정과 행동에 미치는 긍·부정적 영향(지식)을 알고, 원하지 않을 때 반대 의사를 단호히 밝힐 수 있는 방법(기술)을 알려주는 식으로 심화학습을 권고한다.
알바라도 국장은 "포괄적 성교육을 하면 존중과 동의, 지켜야 할 경계 등을 아이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며 "이를 통해 10대들이 낡은 성 규범에서 벗어나게 되면 불평등 구조도 바뀌고, 젠더 기반 폭력의 위험도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④학교가 더 적극적으로 성교육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칠 내용부터 사회적으로 합의하는 것도 필요하다. 현재 우리 공교육은 성교육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학교 입장에서는 성교육을 제대로 하고 싶어도 어떤 것을 가르쳐야 하는지 구체적 기준이 없어 나서기 어렵다. 사회적으로 약속된 성교육 방향조차 없기 때문이다. 초등교사 출신인 서현주 성교육 활동가는 “예를 들어 초등학교 1학년은 수학에서 ‘한 자릿수 더하기를 배워야 한다’ 등의 성취 기준이 있지만, 성교육은 기준이 없어 학교마다 중구난방식으로 가르치게 된다”고 꼬집었다.
이 탓에 '시간 때우기' 식으로 성교육을 하는 학교가 적지 않다. 본보가 더불어민주당 박성준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전국 17개 시도교육청의 성교육 활동 현황 자료를 보면, 강의나 영상물 시청과 같은 방식에 치중해 있었다. 전체 초중고교(1만1,895개교) 중 토론 등 참여형 수업을 하지 않은 곳이 64.6%에 달했다. 경험 많은 성교육 강사들은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가르치면 아이들에게 남는 게 없다"고 지적한다.
결국 내실 있는 성교육을 하려면 학교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 학교들은 쏟아지는 민원 탓에 크게 위축돼 있다. 성교육 전문가인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부모들이 ‘성교육 강사가 마음에 안 드니 바꿔달라’거나 ‘교육 내용이 잘못됐으니 고치라'는 요구를 많이 한다"며 "이 탓에 학교는 최소한으로 성교육을 하게 되고 아이들의 성 인식이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일보·코리아타임스 특별취재팀
팀장 : 유대근 기자(엑설런스랩)
취재 : 진달래·원다라 기자(엑설런스랩), 김태연 기자(사회부), 정다현 기자(코리아타임스), 이지수 인턴기자
사진 : 하상윤 기자, 류기찬 인턴기자
영상 : 박고은·이수연·김용식·박채원 PD, 김태린 작가, 김가현 인턴PD, 전세희 모션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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